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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Jan 23. 2022

소설가 P의 하루 (1)

-소설가 P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소설가 P의 일상은 이러하다.

해가 뉘엿 뉘엿 서녘 하늘로 게을러질 무렵인 오후 5시~6시에 졸린 눈을 부비며 일어난다. 하루하루 잠에서 눈을 뜰 때마다 너무 일찍 일어나는 거 같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저녁 일곱 시까지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있다면, 서녘 해는 이미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바쁜 새벽을 또 시작하기 때문에 아쉬워도 늦잠의 유혹을 뿌리친다. 서쪽 하늘 끝자락에 걸려 꼴딱 꼴딱 숨이 넘어가는 듯한 늦은 해를 하루에 한 번은 봐야 할 거 같은 의무감은 소설가 P의 타고난 구원 의식이다. 해를 한 번은 봐야 뭔가 거룩한 시작이 될 거 같다는.    

 

이어 저녁 8시 무렵에 매우 늦은 아침을 먹고 와인 2잔을 마신 뒤에 다시 잠을 잔다.

와인잔에 따른 그날그날 와인의 양에 따라서 조식 후에 즐기는 달콤한 잠의 길이가 결정되는데, 대략 3시간 정도의 잠을 자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눈을 뜬다. 이 시각 무렵 지구의 반대편, 남미나 미국 혹은 유럽 등지에 살고 있는 소설가 P의 친구들에게 현지 소식을 묻고 '세계 혁명'이라는 거룩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울트라 탑 시크릿 고급 정보를 얻는다.      


마치 여름날 갑자기 들이닥친 소나기처럼 2020년 2월의 어느 날 소설가 P의 운명 앞에 떨어진 아내와의 생이별 그리고 25년간 근속하던 MBC 라디오에서의 실직은 P를 공상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가 즐기는 공상의 목록은 이러하다.

 

<동유럽에 위치한 작은 나라 조지아의 평화로운 시골마을 시그나기 >


'비록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에게서는 버림받았지만, 은하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엠마 왓슨(영화 해리포터 속 헤르미온느)과는 결혼을 할 수 있을 거야. 엠마 왓슨에게 애인이 있다면 그자와 중세식으로 마상 결투를 신청해서 신의 뜻을 물어야지!'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가 되어서 조엔롤링(소설 해리포터의 원작자) 못지않은 인세를 벌 수 있을 거야'     


'2022년 봄부터는 세계 여행을 떠나리라. 여행을 할 나라들의 순서도 이미 다 정해놨다.

동유럽의 조지아 -> 남미의 멕시코 -> 중동의 요르단-> 인도와 네팔'


'하지만 내게 남은 전 재산은 10년 치 세계여행을 할 비용밖에 안되니까, 10년 후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치아바스주의 깊은 밀림으로 들어가서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멕시코 반군에 가담하리라, 그리고 반군이 된 첫날 정찰을 나갔다가 멕시코 정부군의 총알에 장렬히 전사하리라...'


'미국의 위대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유럽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1930년대 스페인 민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국제적 연대를 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것처럼, 나 역시 남미 민중의 자유와 권익 보호, 그리고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가 쫒았던 남미 해방운동의 길을 따라 살다가 생을 마감하리라. '

'누군가가 내 묘지명에 소설가 P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적을 수 있게'   


뭐 이런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진다. 오늘은 다시 계획을 바꿔서 목적지를 칠레로 바꿨는데 칠레에서 체리 나무를 키우며 여생을 보낼 결심을 한 것이다. 요즘 소설가 P가 가장 많이 먹는 과일과 술이 칠레산 체리와 블루베리 그리고 칠레산 와인이다.      


‘이럴 바에야 아예 칠레 안데스 산맥으로 이주를 해서 그곳에서 막 딴 신선한 과일과 와인을 마시면서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체리나무의 열매가 일부 남으면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도 나눠주고...‘    

 

<코카서스 설산 아래에 자리 잡은 조지아의 산마을 우쉬굴리>


소설가 P의 이런 장대한 계획에 대해서, 미국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하는 친구 Emma는 책을 한 권 추천해주었는데, 가브리엘 마르시아 마르께스의 [백 년의 고독]을 읽어보라고 했다. 남미 민중들의 고된 삶의 여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거라며.      


영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Georgie는 1920년대 미국 뉴욕의 리얼리즘 작품들을 읽어보라고 했다. 현대 사회에 내재한 본질적 부조리에 관한 폭넓은 이해를 갖게 될 거라면서. 마지막으로 영국 런던 정치 경제대학에 다니는 Julia는 멕시코 반군에 함께 가입하자는 제안을 했다.      


아, 또 한 명의 이름을 빼먹을 뻔했는데 영국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한국인 2세 재영은 아프가니스탄의 현 실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연을 날리는 소년]을 추천하면서 이 책에 나오는 제3세계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 함께 토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소설가 P의 대학시절 친구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이 부장 : 너무 이기적이신 거 아닌가요?

이곳에 사는 서울 친구들을 위해서 할 일도 많은데 자신만 생각하고 있잖아요.  

종석 : 남미 민중들의 해방은 그들 스스로의 손으로 완수해야지.

진성 : 남과 북의 통일이 우리 민족의 과업인데 한심하게 체리나무 타령이나 하다니..

창우 : 김건희 녹취파일로 세상이 들썩이고 있는데, 대선 판도를 잘 예측해서 박쥐처럼 어디에 붙을까 미리 정해야지. 그래야 앞으로 5년 편안히 발 뻗고 잘 수 있다고!     


소설가 P는 생각한다.

동유럽 코카서스 산맥 아래에 위치한 아름다운 산악 국가 조지아에 가서 포도나무 한그루를 심어 와인을 만들고, 칠레에서 체리나무 서너 그루를 심어 이웃과 신선한 체리의 향과 맛을 나누는 삶이 서울의 오랜 친구들이 말하는 삶보다 부족할까?


<코카서스의 장대한 산맥을 배경으로 서있는 조지아의 중세시대 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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