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부처님과 예수님의 논쟁

by 이안

☮️ "폭력과 믿음 사이에서"


� 부처님


“전쟁은 한 번도 칼에서 시작된 적이 없다.
칼은 마음에서 나온다. 미움이 그것을 쥐게 하고, 무지가 그것을 휘두르게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은 긴 역사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는 피로 먹고 자란다.
그대들이 쏜 탄환 하나하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쏘아진 업의 결과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고, 고통은 고통을 낳을 뿐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단순한 정치나 신앙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탐욕과 집착이 만든, 집단적 무명의 열매다.”


� 해설:


불교는 모든 존재를 인연생기(緣起)의 흐름 속에서 이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도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 여기’의 단절이 아니라,
수천 년간 쌓여온 탐착과 업의 응축된 결과다.
부처는 전쟁을 무명의 연쇄로 이해하며,
해결의 실마리는 '문명의 정당성'이 아니라 무명의 해체, 즉 지혜(prājñā)의 실천이라고 본다.


� 예수님


“나는 그들을 위하여 울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 성벽 너머로 아이들의 울음이 들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돌을 쌓아 성전을 세우고, 그 돌 위에서 총을 겨눈다.
이스라엘이건, 팔레스타인이건, 누구도 하나님을 독점할 수 없다.
믿음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 해설:


예수의 ‘눈물’은 신의 감정이 아니라, 신의 고통에 대한 감응이다.
그는 특정 민족, 특정 종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와 함께 울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을 선택한다.
신앙이 국경과 민족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폭력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 부처님


“유대인의 고통도, 팔레스타인의 비명도, 모두 똑같은 고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은 기억하면서,
타인의 고통은 잊는다.
기억은 연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전쟁에서, 기억은 증오가 되었다.
그대는 신의 이름으로 죽이고, 땅의 이름으로 묻는다.
나는 말한다. 이 세상에 정당한 전쟁은 없다.
불살생은 단지 ‘죽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 한다’는 긍정의 명령이다.”


� 해설:


불살생(ahimsa)은 단지 폭력을 피하라는 소극적 명령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자비를 실천하라는 윤리적 요청이다.
부처는 ‘기억된 고통이 복수의 기제가 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그 기억이 고통을 공감하고 연결하는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예수님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말하는 나조차 두려웠던 명령이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다.
가자에서 폭탄이 떨어질 때, 나는 거기 있었다.
텔아비브에서 피난처를 찾는 어머니가 눈물을 흘릴 때도, 나는 그 옆에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나는 폭풍을 잠재우는 신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너희와 함께하는 신이다.”


� 해설:


예수는 ‘고난의 동행자’로 자신을 제시한다.
기독교는 신이 고통을 없애주는 초월자가 아니라,
그 고통에 함께 머무르고 책임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평화는 무사와 중립이 아니라,
고통의 편에 서는 정의로운 평화다.


� 부처님


“그대가 말하는 사랑은 숭고하다.
그러나 나는 사랑조차도 집착이 될 수 있다고 말해왔다.
이 전쟁의 슬픈 점은, 많은 이들이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가 모두 자기편의 언어로만 말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진짜 자비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의 편에 설뿐이다.”


� 해설:


불교에서 **집착(tanha)**은 심지어 ‘정의’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
자신의 정의만을 진리로 믿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의 씨앗이 된다.
부처는 이를 경계하며, 고통 그 자체에 대한 감각을 회복할 것을 요청한다.
그는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둔다.


� 예수님


“나는 양을 위해 생명을 버린 목자다.
하지만 나는 양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나는 이방인을 위해서도, 죄인과 군인, 성전의 상인들조차 위해서도 죽었다.
나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품기 위해 십자가를 택했다.
그대의 중도는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중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처 입은 자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 해설:


예수는 보편적 구원, 무조건적 사랑을 강조한다.
그는 ‘가해자조차 구원 가능하다’는 논리를 통해 죄의 구조적 회복을 주장하며,
중립이나 균형이 아니라 완전한 자기희생의 윤리를 설파한다.
그가 말하는 평화는 무장의 평화가 아니라, 마음의 회복이다.


✨ 결론 (서술형 마무리)


부처님과 예수님의 대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민족의 고통을 넘어
인류 전체가 안고 있는 폭력의 구조를 향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부처는 무지와 집착을 버리라고 말하고,
예수는 용서와 사랑으로 끌어안으라고 말한다.

하나는 내면의 평화를 통한 외부의 전환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고통의 참여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한다.
둘은 방식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을 상처 내지 않도록 하자는 점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부처와 예수가 지금 그 땅 위에 있다면,
한 사람은 조용히 명상하며 눈을 감을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울음을 품에 안고 함께 울 것이다.

그리고 둘 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되,
고통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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