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와 전율』과 윤리를 넘어서는 믿음
윤리는 누구에게나 통용되어야 한다. 살인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타인을 해치지 말 것. 인간 사회는 그런 법과 도덕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윤리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신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를 희생시키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면?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의 침묵을 불러낸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그는 침묵한다. 그는 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믿는다.
키르케고르는 19세기 유럽을 지배한 헤겔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이성의 체계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철학, 보편성과 객관성을 최고로 여긴 사유에 그는 한 개인의 신앙을 들이밀었다. 아브라함은 설명할 수 없는 명령 앞에 선다. 그것은 윤리를 초월한 신의 요구이며,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다.
당시 기독교는 제도화되고, 믿음은 습관이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크리스천’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그는 신앙을 위안이 아니라 도약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도약은 이성의 끝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은 윤리의 보편성을 중단시키는 특수성 속에 존재한다.” 아브라함은 살인을 명령받는다. 그것은 어떤 윤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그는 ‘신이 이삭을 다시 줄 것’이라는 불합리한 믿음 속에서 칼을 들었다. 그 믿음은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침묵 속에서 행해진다.
키르케고르는 그를 ‘윤리의 일시적 중단자’이자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은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책임을 진다. 이때의 신앙은 감정도, 전통도 아니다. 그것은 불합리한 것을 감히 긍정하는 용기, 즉 도약이다.
소크라테스: “나는 덕을 아는 것이 곧 선한 삶이라 말했네. 그런데 윤리를 넘는 믿음이라니, 그것은 미신이나 광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키르케고르: “윤리는 선하지만, 절대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광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 앞에서만 정당한 고독의 실존입니다.”
소크라테스: “신이 어떤 도덕보다 우선한다면, 그것은 정의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네. 설명되지 않는 행위는 악과 무엇이 다른가?”
키르케고르: “맞습니다. 신앙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살아내야 할 내면의 긴장입니다. 신의 명령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광기와 구분되는 것은, 그 침묵 속의 떨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었기에 두려워했고, 두려웠기에 사랑했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신앙은 지식이 아닌가?”
키르케고르: “신앙은 앎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그것은 불합리 속에서의 긍정이며, 윤리를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설명 가능한 삶을 원한다. 데이터, 법, 윤리, 논리. 그러나 인생에는 어떤 순간이 있다. 사랑하지만 떠나야 할 때, 정의로워야 하지만 용서해야 할 때. 그 순간, 윤리는 우리를 떠나고, 남는 것은 고독한 결단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을 그 고독한 자리에 위치시킨다. 그는 묻는다.
“너는 모두가 비난할 때도,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감히 선택할 수 있는가?”
그 믿음은 자기 위안이 아니라, 자신을 해체하는 통과의례다. 그 자리에서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신앙은 감정이나 관습이 아닌, 이성의 끝에서 행해지는 실존적 도약입니다.
윤리는 중요하지만, 절대화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때로 윤리를 넘어서는 책임을 요구합니다.
『공포와 전율』은 믿음이란 이름 아래 감춰진 광기를 비판하면서도, 진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적 성찰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자기실현은 자기 집착이 아니라, 자기 해체의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