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실현과 단독자의 탄생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돼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대, 사회의 역할, 비교 속의 자아를 붙잡고 살아가며, 그것이 '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깊은 침묵 속에서 문득 떠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정말 내가 되고 있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 물음을 실존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말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절망이다."
19세기 덴마크, 인간은 점점 대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은 제도화되고, 인간은 군중의 익명성 속에서 안주했다. 주체란 자신의 결단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의 함수가 되어갔다.
이 시기 헤겔은 이성의 보편성을 강조했고, 루터파 기독교는 신앙을 문화로 전락시켰다. 키르케고르는 그 모든 보편성과 체계에서 이탈해, 한 개인이 신 앞에 선다는 것, 그 실존의 순간을 철학의 중심에 놓았다.
키르케고르는 자아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 관계가 불화하거나 끊어질 때, 인간은 절망 속에 빠진다. 그러나 진정한 자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실존의 결과이다.
그는 말한다. "인간이란 가능성이다."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선택하며 성립되는 지속적 생성의 주체이다. 그리고 이 자기 됨은 항상 고독하다. 군중 속에서가 아니라, 신 앞에서. 이해받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홀로 결단할 때 인간은 진정한 자신이 된다.
소크라테스: "나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해 왔네. 그런데 그대는 '자기 자신이 돼라'라고 말하는군. 이 두 말은 어떻게 다른가?"
키르케고르: "자기를 아는 것과, 자기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인식이고, 후자는 결단이지요. 아는 것은 머무를 수 있지만, 되는 것은 고통 속에서 진행됩니다."
소크라테스: "그대의 말은 결국, 자아란 스스로를 만드는 존재라는 말인가?"
키르케고르: "그렇소. 자아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이며, 책임의 무게 속에서만 탄생합니다."
소크라테스: "허나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고독 속에서 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너무 폐쇄적이지 않은가?"
키르케고르: "고독은 단절이 아니라 심연입니다. 신 앞에서 선다는 것은 고립이 아니라, 진실한 자기와 마주하는 자리이지요. 그 고독을 통과한 자만이 타자 앞에서도 진실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실현하라 말하지만, 대부분은 비교 속에서 자기를 구축한다. 자기 계발, 커리어, SNS 속 정체성… 그것이 진짜 '나'일까? 우리는 '보이는 나'를 살며, '느껴지는 나'를 망각한다.
키르케고르는 이 흐름을 역행한다. 그는 말한다. 자기를 알되, 그 앎에 책임질 수 있는 자만이 자기를 이룬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이해받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는 진짜 '나'를 묻고 있는가? 아니면, 남들이 알아볼 만한 '나'를 포장하고 있는가?
자기실현은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주어진 정체성이 아니라, 실존적 선택의 누적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나 자신이 돼라’는 말의 실존적 비장함을 통해,
현대인의 자아 착각을 깨뜨리는 거울을 제공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자유와 죄의식 사이, 인간은 왜 불안을 느끼는가?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불안을 따라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