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에 이르는 병』과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함’
절망은 어디서 오는가? 죽음의 공포도, 실패의 고통도 아닌데 마음이 무너지고 삶이 공허해질 때, 우리는 무엇에 병들고 있는가. 바쁘게 살아가지만 도무지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모든 것이 잘된 듯한데도 이유 없는 허무가 밀려올 때, 그 이름 없는 고통을 키르케고르는 ‘절망’이라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묻는다.
"너는 너 자신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이 바라는 너를 살고 있는가?"
19세기 덴마크, 기독교는 제도의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신은 교회의 권위로 봉인되었고, 인간은 하나님 앞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자기 얼굴을 잃어갔다. 철학은 헤겔의 체계적 관념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그 모든 설명을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철학이 도달할 수 없는 한 개인의 내면, 자기 자신이 되려는 고독한 실존의 자리에서 철학을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사유가 아니라 삶이며, 보편성이 아니라 고백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는 말한다.
“절망은 자기가 자기가 되기를 원하지 않거나,
자기가 자기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이 정의는 단순한 감정의 묘사가 아니라, 실존의 구조를 드러낸다.
자아란 단순히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자신과의 동일성 안에서 성립시키는 관계’이다. 그러나 그 관계가 깨질 때, 즉 자기가 자기를 부정하거나 회피할 때, 절망이 시작된다.
그는 절망을 세 단계로 나눈다:
무지한 절망, 자각된 절망, 그리고 의도적 절망.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마지막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면서도, 되기를 거부하는 상태.
그것은 단지 불행한 상태가 아니라, 자기를 배신하는 존재론적 병이다.
절망은 치유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그것은 단지 심리치료나 긍정적 마인드로 해결될 수 없다. 그는 절망의 치유를 '자기 자신이 되려는 의지'와, 그 자기 됨이 '신 앞에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말한다. "절망은 인간이 신과의 관계를 회피할 때 시작되고, 다시 그 앞에 설 때 극복된다."
이 말은 신앙이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실존의 진실함과 직결된다는 뜻이다. 신은 키르케고르에게 초월적 교리의 대상이 아니라, 내면의 심연이 비추는 거울이었다. 진실한 존재는 그 거울 앞에서만 가능하다.
소크라테스: "나는 무지함을 아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라 믿었지. 그런데 자기를 알면서도 되기를 거부한다니, 그건 무지가 아니라 무엇인가?"
키르케고르: "그것은 무지보다 더 깊은 병입니다. 절망은 진실을 본 뒤에도, 그 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고통이지요."
소크라테스: "그러나 앎은 늘 행위로 이어지지 않던가? 우리는 진리를 알기에 따라 실천한다."
키르케고르: "아니오. 절망은 이성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실천의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고장입니다.
진리를 알고도 외면하는 것, 그것이 절망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 병의 치유는 앎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말인가?"
키르케고르: "예. 절망은 이성으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절망은 오직 신 앞에 선 자,
즉 자기 자신이 되기를 결단한 자만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절망은 우울증, 번아웃, 자기혐오, 공허함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외형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다. 자기가 자기를 되기를 거부하는 상태, 아니, 애초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를 포기한 상태. 우리는 SNS 속 타인의 삶을 따라 하며 자기 존재를 지워간다. 우리는 안정된 경력을 좇으며 영혼의 균열을 외면한다.
그 속에서 절망은 조용히 퍼지고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기를 원하는가?"
절망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자아와 존재의 구조적 균열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통해 실존철학의 출발점인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제시합니다.
이 사유는 오늘날 자기 소외와 비교 중독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력한 성찰을 요청합니다.
철학은 고통을 없애지 않지만, 고통을 바라보는 눈을 줄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포와 전율』 속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도약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윤리를 넘어서는 신앙은 가능할까요? “신앙은 도약인가, 착각인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두려움과 신의 침묵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