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신단의 행렬은 겉으로는 장엄했다. 말 앞에는 기치를 든 군사가 서고, 뒤로는 수십 리를 이어진 수레와 말이 먼지를 일으켰다. 보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권위’를 각인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눈은 화려한 외양보다는 그 뒤에서 땀 흘리는 사람들의 얼굴로 향했다. 짐을 진 인부들, 나귀를 몰며 진흙길을 버거워하던 장정들, 객주 마루에 널브러져 하룻밤을 겨우 버티던 무명인들의 모습.
《열하일기》는 단순한 외교 보고서가 아니라, 민중의 얼굴을 문학으로 남긴 기록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은 여전히 ‘사대(事大)’의 예법과 명분을 우선시했지만, 연암은 그 껍질을 벗기고 현실을 보았다. 그는 이미 그 길 위에서 ‘국가의 근본은 민중의 삶’이라는 사유에 다가가고 있었다.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오후도압록강 행삼십리 노숙구련성 야대우즉지)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삼십 리를 더 가서 구련성에서 노숙하였다. 밤에는 큰비가 그쳤다"
— 《도강록(渡江錄)》
연암은 단 네 구절로 하루를 요약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강을 건너고, 다시 삼십 리를 걸어, 노숙에 이른 수많은 장정과 인부들의 고단함이 스며 있다. 화려한 행렬을 떠받친 것은 결국 그들의 어깨였다. 연암은 장황한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
조선의 다른 지식인들이라면 ‘사신의 위엄’을 부각했을 장면에서, 그는 노숙이라는 단어 하나로 현실을 드러냈다. 이 간결함은 곧 진실의 무게였다. 또한 이 장면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모순을 비춘다.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며 자급농업에 머물던 조선의 지식인 사회와 달리,
연암은 국경을 넘는 고달픈 행군 속에서 백성의 현실을 기록했고,
바로 그것이 새로운 실학의 출발점이었다.
사신단이 묵은 여관과 객주는 항상 붐볐다. 좁은 방에 열 명 남짓이 다리를 포개고 앉아 글을 쓰려하면, 붓끝이 옆 사람의 귀를 찌른다. 잠을 청하면 서로의 코 고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려 장단을 이루었다. 연암은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불평으로 남기지 않고 해학으로 기록했다. (원문 그대로는 아님, 연암 문체를 본뜬 재구성)
이 작은 일화는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그것은 곧 당시 조선과 청의 숙박 인프라, 여행자의 생활 조건을 보여주는 생생한 문화사적 기록이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사신단은 ‘국가의 체면’을 짊어진 집단이었으나, 실제 그들의 숙소는 빈곤한 백성과 다르지 않았다. 연암은 그 모순을 포착했다. 그는 권위를 벗겨내고,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학문을 백성과 연결하려 했다. 이는 오늘날 인문학이 추구해야 할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연암은 길 위에서 만난 장사꾼들의 활발한 활동에도 눈길을 주었다. 압록강 부근의 장터에는 조선의 인삼과 청의 비단이 맞바뀌었고, 소금과 약재가 오가며 장정들의 어깨에 실렸다. 공식적으로는 군사와 관리가 국경을 지킨다고 했지만, 실제로 국경을 이어주던 것은 장사꾼들의 교역이었다.
박지원은 이러한 모습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백성의 삶은 이미 경계를 넘어 서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
(원문 그대로는 아님, 연암의 기록을 현대적으로 요약)
조선의 지식인들이 여전히 ‘오랑캐’와 ‘중화’라는 이분법에 매달려 있을 때,
연암은 장터의 현실을 보았다.
그는 경제 활동이야말로 백성을 살리고 국가를 풍요롭게 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진리를 읽었다. 이는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이어졌다.
정치가 경계를 세울 때, 민중의 삶은 이미 그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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