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햄릿], 영화, 셰익스피어-4편.

복수의 미로, 기억의 유령

by 이안

1. 도입 — 영화의 장면과 사회적 울림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강렬한 복수극이자, 세계적으로도 컬트적 지위를 얻은 작품이다. 영화는 15년 동안 이유도 모른 채 감금당한 오대수(최민식)가 풀려난 뒤, 자신을 가둔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광기의 여정을 걷는 이야기다.


초반부 “누가, 왜 나를 가뒀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스릴러적 호기심을 넘어,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오대수의 얼굴에 번지는 공허한 웃음과 절규, 그리고 폭력은 모두 기억의 무게와 맞닿아 있다. 그에게 감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완전히 지워진 공백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단순한 복수극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솟아나는 기억과 욕망이라고 말한다.


오대수는 감금에서 풀려나자마자 폭력으로 반응하지만, 그 폭력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아이러니가 기다리고 있다. 《올드보이》는 장르적 관습 속에 철학적 질문을 녹여낸다.


복수는 무엇이며, 기억은 인간을 어디까지 이끌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관객을 불편하게 흔든다.


2. 셰익스피어의 대사와 맥락


“Remember me.”
— 『햄릿』 제1막 제5장“나를 기억하라.”


이 대사는 아버지의 유령이 햄릿에게 복수를 명령하며 던진 말이다. 유령은 햄릿의 의지와 삶 전체를 기억의 굴레로 가둔다. 이 순간부터 햄릿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된다. 기억은 명령이 되고, 명령은 삶을 지배한다. 햄릿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아버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과,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회의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는 단순히 살인을 실행하는 복수자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묻는 존재다. 『햄릿』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가 기억이라는 외부적 명령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고 무너지는지, 셰익스피어는 극 전체를 통해 탐구한다.


햄릿이 “기억하라”는 대사에 붙잡혀 파멸로 향하는 과정은,
결국 인간이 과거와 기억에 의해 얼마나 깊게 지배되는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3. 두 작품의 교차 — 기억의 족쇄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햄릿』의 왕자 햄릿은 모두 기억이라는 족쇄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오대수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지 못하는 ‘망각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이 남긴 ‘기억의 감옥’에 붙들려 있었다.


오대수에게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은 곧 파멸의 순간이다.
기억은 복수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파멸을 불러온다.
햄릿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그는 덴마크 궁정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기억하라”는 명령은 햄릿을 복수와 죽음의 길로 끌고 간다.


박찬욱 감독은 오대수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이 과거의 기억에 얼마나 얽매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대수는 기억을 되찾고 나서야 복수의 목적을 알게 되지만, 바로 그 기억 때문에 완전히 무너진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햄릿도 다르지 않다.

두 인물 모두, 기억이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동시에 속박하는 모순적 힘임을 증언한다.


4. 언어와 영상 — 기억의 형상화


셰익스피어는 유령의 목소리라는 언어로 기억을 각인시켰다. 목소리는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며, 햄릿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반면 박찬욱은 영상으로 기억을 구현한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오대수의 눈, 철창 너머 텔레비전 화면, 산낙지를 씹는 장면 같은 극단적 이미지들은 기억의 폭력성을 육체에 새긴다.


특히 박찬욱은 색채와 구도를 통해 기억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붉은색과 어두운 녹색은 폭력과 욕망을 상징하고, 밀폐된 공간은 기억에 갇힌 인간의 영혼을 보여준다. 언어와 영상은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무의식 깊숙이 침투하는 기억의 공포를 드러낸다. 셰익스피어는 언어의 울림으로, 박찬욱은 영상의 충격으로 관객의 정신에 기억을 새겨 넣는다.


5. 상상 대화 — 햄릿과 오대수


햄릿:“그대는 왜 그토록 복수에 집착하는가? 복수는 영혼을 잠식할 뿐.”

오대수:“나는 선택한 게 아니오. 기억이 나를 가뒀지. 기억을 지우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이 나를 이끌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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