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자의 유산을 제국으로 바꾸다
632년 무함마드가 숨을 거두었을 때 공동체는 모래 위에 서 있었다.
후계자는 지정되지 않았고, 각 부족은 조공과 동맹을 재검토했다.
메카와 메디나를 잇는 신앙의 열기는 남았지만, 국가를 지탱할 제도는 미완성이었다. 그러나 이 위기가 붕괴로 끝나지는 않았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이슬람은 아라비아를 넘어 시리아·이라크·이집트·이란으로 뻗었고, 예언자의 추모는 곧 문명의 기초 공사로 바뀌었다. 이 전환의 현장, 정통 칼리파 시대를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공동체가 흔들리며 성장하는 이야기로 따라가 보자.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장인이던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의 사쿤에서 논쟁 끝에 칼리파로 추대된다.
가장 먼저 그가 마주한 것은 ‘리다(배교) 전쟁’이었다. 일부 부족은 “우리는 무함마드에게 충성했지 메디나에 조세를 바치기로 약속한 게 아니다”라며 이탈했고, 거짓 예언자를 자처한 무사일리마 같은 세력도 등장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는 죽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는 선언으로
움마의 권위를 신의 권위 아래 두었고,
조세와 충성을 ‘종교 의무이자 정치 질서’로 재정의했다.
싸움은 단지 군사적 진압이 아니었다. 사케인·자카트·예배 같은 신앙의 기둥을 공동체 유지 장치로 엮는 작업이었고, 그 과정에서 전사들이 대거 전장에 나가면서 꾸란 암송자들이 희생되자 그는 꾸란 보존을 국가 과제로 삼는다. 제자 자이드 이븐 사비트를 중심으로 흩어진 구절을 모아 한 권으로 엮게 한 결정은, 신앙을 말이 아니라 문서와 기록으로 붙드는 첫 행정 개혁이었다.
두 번째 칼리파 우마르는 가차 없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사막과 국경의 냉혹함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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