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쿨팡 Jul 07. 2021

정수리 요새를 탈영한 탈모병

오늘, 탈모를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순응이다.


탈모, 탈출한 자

샤워를 끝내고 물기를 닦는다. 물을 먹어 안색이 변한 수건 사이로 욕실 바닥이 보인다. 추락의 충격으로 몸뚱이가 꺾이고 꼬인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다. 마치 기운을 잃고 떨어진 병든 솔잎처럼 보이지만 어설픈 연기에 속지 않는다. 이들은 한바탕 폭우의 혼란을 틈타 정수리 요새를 탈영한 탈모병들이다. 의무를 패대기친 범죄자들.
언제부터였을까? 탈모병의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간다. 한때는 나의 정수리 요새를 지키던 충직한 병사들이 이제는 수채 구멍에 매달려 몸부림친다. 그 모습이 안쓰럽고 언짢고 뵈기 싫다. 나는 수채 구멍이란 지옥의 입구에서 선심 쓰듯 그들을 건져 낸다.



정수리 요새

시커먼 무저갱의 입구에서 건져진 우리는 안도한다. 누가 먼저였을까? 폭우의 혼란을 틈타 목숨을 걸고 탈모했지만 우리 앞에는 쓸림과 허우적거림뿐이었다. 우리는 한 몸처럼 똘똘 뭉쳐 버티고 또 버텼다. 안간힘을 다해 내 형제를 붙잡고 엉켜 있길 한참, 거세던 홍수가 자자든다. 최악의 상황을 넘기니 이제서야 정수리 요새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탈모를 했다는 자괴감, 최선을 다해 정수리 요새를 지키지 못한 패배감, 힘들다고 놔 버린 안일한 태도, 무작정 벗어나고 싶었던 치기 어린 마음을 반성한다. 부대끼며 살던 그곳이 그립다.





더디 썩는 단백질 줄기

나는 정수리 요새의 변방인 콧수염 언저리까지 탈모병들을 들어 올린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날숨을 길게 내뺀다. 진한 아쉬움과 노기가 섞인 더운 바람이 그들에게 닿지만 물폭탄에 실컷 두들겨 맞은 패잔병들의 몸을 데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들은 얼마 동안 나의 정수리를 지켜 왔을까? 1년? 10년? 가늠할 수도 없고 더이상 중요하지도 않다. 분명한 건 불철주야 먹이고 씻기고 보살펴 주었던 숙주의 몸에서 이들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이제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나의 시간과 탈모병의 시간은 이미 저만치 흘러갔다.


바람의 기억

정수리 요새 근처까지 올라 오니 규칙적인 바람이 분다. 처음 느껴보는 차분한 바람이다. 정수리 요새에서 맞았던 그 시절 그 바람이 생각난다. 중동의 메마른 우물가를 닮은 그 바람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질척이던 땅은 금세 말라 먼지를 날렸다. 독한 물담배의 연기 같던 바람이 지나가면 샤프란 향의 미끈한 오일이 온몸을 감쌌다. 젖고 마르고 털리고 잘리던 호시절. 짧고 뻣뻣한 성격으로 소문난 콧수염들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린다.



비명의 회오리

나는 응당 탈모병들을 벌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탈모병을 눈앞에서 가차 없이 치워야 한다. 수채 구멍에 두면 너나 나나 미련이 남는다. 이들을 정수리 요새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은 내가 더 굴뚝같지만 순리에 어긋난 미련이다. 그러니 너도 미련을 버리고 멀리 떠나가라. 징계는 짧고 확실해야 후유증이 덜하다. 탈모병, 너희들에게 비명의 회오리를 선사한다. 한순간이다.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의 소리와 함께 깊은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면 그만이다. 너희의 비명은 나에게 들리지 않을 테지만 너희는 악다구니를 지를 것이다. 나는 너희를 비명의 회오리에 던져 벌하리라.



순백의 호수

우리는 다시 물 위로 던져졌다. 잔잔하다. 사방이 온통 하얀 순백의 계곡에 둘러싸인 호수다.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정수리 요새에 있던 시절 종종 들었던 그 소리가 매우 가까이에서 들린다. 갑자기 잔잔했던 호수가 출렁이며 돌기 시작한다. 붙잡을 것도 없고 지탱할 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뭉쳐서 버텼는데 이제는 엉켜 있어서 더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흩어져서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데 내 형제들은 날 놓아주지 않는다. 빠져나가려는 날 붙잡고 모두가 빠져나가려 하니 우리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회오리 끝이 열리며 수채 구멍보다 큰 암흑이 입을 쩍 벌린다. 안간힘을 써보지만 회오리의 중심으로 끌려가는 나의 몸은 너무나 가볍다. 누군가는 아직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 엉켜 붙음에 생의 아쉬움이 우악스럽게 느껴져 슬프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본다. 내가 한때 살던 정수리 요새가 빙빙 돌며 멀어지고 있다. 어지럽지만 눈을 감고 싶지는 않다. 어두워진다. 빛이 없다. 무섭다.


시간과 유전의 예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탈모병들의 최후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물론 탈모병을 감싸며 변호하는 목소리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시간과 유전이라는 예언에 따라 행동한 순교자였는지 모른다. 지금와서 그들을 어떻게 부르던 변하는 것은 없다. 정수리 요새의 기근과 낙후는 자명하다. 요새는 무너져 갈 것이고, 탈모병 혹은 순교자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나는 잘 안다. 정수리 요새는 형체만 아슬하게 남아 있는 고대 유적지처럼 변해가고 있다. 서글프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미역 줄기 용사가 되어라

오늘 내가 징벌 내린 탈모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수도 지옥의 어디쯤일까?

한 여름 뙤약볕에서 요새를 지키던 그대들의 충성이 그립다. 부디 바라건대 하수 세계의 고난을 이겨내고 푸른 바다를 만나라. 그곳에서는 무적의 수중 요새를 지키는 미역 줄기 용사가 되어라. 한때는 너의 징벌이었던 물의 보호와 축북을 받으며 오래오래 살아라.



작가의 이전글 백수가 주말을 더 기다리고 월요병도 더 심하게 앓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