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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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9일. 이세돌 9단이 10년 만에 그 방으로 돌아갔다. 서울 포시즌스 호텔 아라홀. 알파고에게 4:1로 졌던 바로 그 방. 그런데 이번엔 맞은편에 적이 없다. AI는 이제 그의 파트너다. 이건 바둑 얘기가 아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얘기다.
2016년 3월, 전 세계 150개국에 생중계된 이 대결은 단순한 시합이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과 기계의 연산, 수 읽기와 직관의 충돌이었다. 당시 바둑은 인간 직관의 정점으로 여겨졌다. 경우의 수가 무한에 가깝고, 즉각적인 형세 판단이 요구되는 게임.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모두가 믿었다.
결과는 알다시피 4:1. 알파고의 통산 전적 74전 73승 1패, 그 단 하나의 패배가 이세돌에게 당한 것이다. 인간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런데 진짜 충격은 승패가 아니었다. 알파고는 바둑을 이긴 게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이긴 것이었다.
알파고 대국이 있던 2016년, 한때 1,000곳 이상이던 바둑 학원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명지대는 국내 유일의 바둑학과를 폐지했다. 폐과가 결정된 후 재학생 다수가 전공을 바꾸거나 휴학했고, 마지막 신입생 20여 명 가운데 이번 학기 전공 수업을 듣는 학생은 5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키오스크가 들어오면서 알바가 줄었다. 코로나가 오면서 무참석 장례식이 생겼다. 비용 앞에서 결혼식이 사라지고 있다. 무빈소 장례가 새로운 문화가 됐다. 1인 가구가 늘면서 "함께 하는 것"들이 하나씩 소멸하고 있다. 사람이 저항하더라도, 그 관습이 지켜질 이유를 잃으면 산업은 사라진다. 노동과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무엇이 살아남는가. 야구를 보자. ABS 자동 볼판정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심판은 승부를 결정짓는 게임체인저에서 경기를 주관하는 역할로 바뀌었다. 심판의 오심에 분노하던 관중의 스트레스가 줄었다. 룰이 공정해졌다. 그 룰에 적응한 선수는 살아남았고, 심판의 경향에 맞추던 선수는 도태됐다. 야구가 망했는가? 아니다.
바둑계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기사들은 AI를 넘을 수 없는 산으로 인정하고, 실력을 끌어올리는 훈련 도구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송지훈 9단은 말했다. "대부분의 훈련을 AI와 합니다. 나보다 강한 선수가 24시간 대기 중인 셈이죠."
AI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 4개국 위주로 돌아가던 바둑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됐다. 남미에선 알파고 대국 이듬해에 첫 바둑 대회가 열렸고, 국제바둑연맹 회원국은 1982년 29개국에서 현재 79개국으로 늘어났다. 저항이 아니라 적응. 그리고 적응을 넘어 확장. 이것이 살아남은 것들의 공통점이다.
이세돌이 이번에 할 것은 바둑이 아니다. AI 에이전트와 대화하며 즉석에서 바둑 모델을 실시간으로 재구성하고, 음성 명령만으로 기획부터 실행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는 AI의 역량을 시연했다. 앤스로픽,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가 공식 스폰서로 이름을 올렸다.
이건 AI 스타트업의 홍보 무대다. 그 사실이 이 장면의 의미를 지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선명하게 만든다.
지금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아무도 "내비게이션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켠다. 이세돌의 복귀로 AI 에이전트가 삶에 매우 가까이 왔음을 발견한다.
바둑에서 "수를 읽는다"는 건 두 가지 의미다. 상대의 다음 수를 예측하는 것, 그리고 전체 판의 흐름을 보는 것. 이세돌은 말했다. "AI가 바둑에서 창의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AI와 협업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고 영감을 얻어야 한다."
이건 바둑 기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매 순간 소문에 흔들리며 사고파는 투자자, 트렌드를 좇다 자기 목소리를 잃는 창작자, 조직의 관성에 갇혀 판이 바뀌는 걸 못 보는 직장인. 전략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이 서 있는 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바둑이 살아남은 건 바둑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변상일 9단은 말했다. "AI로 연습한 높은 승률의 수를 외워서 경기에 옮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중반부터는 온전히 자기 실력으로 풀어야 한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도구는 바뀌었다. 하지만 판을 읽는 건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시대가 변할 때, 변하지 않는 산업은 사라진다. 변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 사람들의 새로운 필요를 먼저 읽는 사람, 그 필요에 맞는 가치를 만드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아니, 그 판을 새로 만든다.
일하고 돈을 받는 월급 문화에 대해서도 이제 다르게 생각할 때가 왔다. AI가 반복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는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다. 그 인식을 빨리 가지는 사람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새로운 판 위에서 먼저 움직일 수 있다.
10년 만에 그 방에 다시 선 이세돌의 모습에서, 한국 사회의 변곡점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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