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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ug 28. 2016

정말 그렇게 가버린 거니.

2016.8.28.



 올해 들어 최고로 많은 들은 말


   일기 예보에서 '올해 들어 최고'로 많이 들은 말은 '올해 들어 최고' 기온이라는 말이다. 올여름 '더위'라는 녀석은 정말 굉장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아침부터 맹렬히 기온을 끓어 올렸다. 더운 공기로 코로 들이마시다 보면 어느새 접힌 살에 스며든 땀이 느껴졌다. 에어컨을 적당히 틀었다 껐다 하는 자각도 점점 희미해졌다. 잠깐 끄면 어느새 훅해지는 공기에 전기세 걱정은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더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리우 올림픽' 보다 더한 존재감을 뽐냈다. 단 하루라도 쉴틈을 주지 않으며 사람들 혼을 쏙 빼놓았다. 화끈하고 대단한 더위로 모두들 정신을 못 차리던 여름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녀석이 가버렸다. "이제 좀 슬슬 가보려고"라는 힌트도 주지 않고, 갑자기 맘 변한 바람둥이처럼 어느 날 밤 떠났다. 선선하다 못해 아침엔 싸늘하기까지 한 날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뜨거운 김 속에 만두를 포장해주던 사장님은 더워서 못 살겠다 했고, 벌게진 얼굴에 땀이 뚝뚝 흐르던 아들은 왜 이렇게 더운 거냐고 매일 물어봤다. 자려고 누운 신랑은 티셔츠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매일 밤 투덜거렸건만, 이렇게 예고도 없이 사라진 더위에 다들 황당한 얼굴이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밤낮으로 구애를 하던 남자가 갑자기 변심이라도 한 것마냥, 조금 이상해졌다. 뭐, 그리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막상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랄까. 



갑자기 변하는 건 무섭다


   돌이켜보면 난 항상 갑자기 변하는 것이 싫었다. 대학교 입학 한지 얼마 안돼서 옷을 산다고 시내 지하상가를 돌아다닐 때 일이다. 쇼윈도에 디스플레이된 옷의 스타일이 맘에 들어 샵에 들어가니 마네킹처럼 예쁜 언니가 있었다. 눈웃음을 치는 반달눈에 살짝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어울릴 것 같다며 친절하게 이것저것 꺼내 주었다. 제일 맘에 들었던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더니 너무 잘 어울린다며 허리끈의 리본도 매주 었다. 내 옷 모양을 잡아주는 그녀에게 화장품인지 향수 냄새인지 알 수 없는 진한 꽃향기가 났다. 나도 전신 거울에 앞 뒷모습을 살펴보며 꽤 마음에 들던 참이었다. 그리고 옷의 가격을 물어보았다. 아뿔싸. 내가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비쌌다.'물어보고 입어보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신용카드는 고사하고 체크카드도 잘 안 들고 다니던 때였다. 쑥스러워 '돈이 부족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언니, 저 좀 생각해보고 올게요"


  벗은 원피스를  조금 미안하게 건네었을 때였다. 아까 전까지 곰살맞던 언니는 알았다며 내 옷을 낚아챘다. 종전의 웃음기가 싹 가셔버린 얼굴 표정에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고 내색을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언니는 옷을 재빨리 옷걸이에 걸고 옷 매무새를 다시 만지며 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 조차 꺼내기도 무안해져 가게 문을 나섰다. 내가 좀 어려서, 친구 없이 혼자 가서 였을까. 아니면 그때 옷가게 사장님의 매출이 바닥을 치고 있던 시기였을까. 백화점도 아닌데 너무 옷을 입고 오래 있었던 걸까. 자책과 함께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며 집에 돌아왔었다. 그때 이후로는 구매할 확률이 거의 백 프로 가까이 되어야 옷을 입어본다. 



천천히, 은근하게 다가가는...

   내가 인생을 그리 많이 산 건 아니지만, 쉽게 타오르는 건 정말 쉽게 변한다. 그리고 그런 건 대부분 참 매력이 없다. 금방 달아올라 타버리는 얇은 프라이 팬 보다는 두꺼운 무쇠 팬이 오래 쓰고 깊은 맛을 낸다.(그리고 더 비싸다) 돌이켜보면 갑자기 과다한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결국 나에게 무언가를 팔 요량이었다든가 아니면 그저 그 사람의 변덕인 경우도 많았다. 딱 2번 만난 미팅남이 장문의 메일을 보내오면, 도대체 날 얼마나 봤다고 이럴까 싶었다. 미지근한 내 반응에 신속하게 연락이 뚝 끊기면 좀 무섭기까지 했다.   


  맘에 드는 누군가에게 항상 은근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선물을 하고, 서로 연락을 많이 하고, 그저 칭찬을 늘어놓기보다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마주하는 게 좋았다. 실제로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주 천천히 은근히 달아오르는 관계가 더 오래가고 결과도 좋았다. 그 누군가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주기보다 오래오래 파스텔톤 향기를 뿜고 싶었다.(실제로 난 그런 사람일지는 자신이 없다)   




다시 날씨 이야기로 돌아와서


시원해진 날씨가 좋긴 하지만 '더위'라는 녀석에게 좀 서운하다. 

조금 천천히 높은 하늘을 보며 

서서히 가을을 예감하는 시간을 좀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녀석은 올여름 모두의 혼을 쏙 빼놓고 

하루 만에 그렇게 휙 가버렸다. 


쉽게 변하는 건, 

날씨든 사람이든 싫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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