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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Sep 02. 2016

늦은 사춘기가 더 무섭다

2016.9.1.




그리운 학창 시절?


"어릴 때가 진짜 좋았는데..."


 아빠 손을 잡은 꼬마를 보며 '한복 아가씨'가 말했다.('한복 아가씨'라는 별명은 작년 '전국 한복 아가씨 선발 대회'에 나가서 인기상 수상한 이후로 지어 준 별명임) 한때 고소영이 있는 소속사에서 연기수업을 받으며 연예인을 꿈꿨던 그녀는 아마 나와는 무척 다른 학창 시절이었을 것이다. 한복 아가씨가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1등을 먹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일 나이에, 나는 x와 y를 빠르게 연습장에 휘갈기며 연립방정식을 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했던 미팅으로 첫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는데,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도 한참 뒤인 2학기가 돼서야 어색함에 손이 오그라드는 미팅을 해봤다. 한복 아가씨가 옆에서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에 내가 대답했다.


"난 돌아가기 싫어. 그건 네가 이쁘고 인기가 많아서 그래"



사춘기 없던 10대

나는 모범생이었다. 공부도 곧 잘 잘했다. 상위 0.1퍼센트에 들지는 못해도. 반에서 3등 안에는 꼭 들었다.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고 그때 공부는 그저 전부였다. 지금도 가끔 시험이 내일인데 아직 훑어보지 못한 시험 범위가 남아있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꿈을 꾼다. 당시에 '우선순위 영단어'라는 단어장을 한 장씩 찢어서 교복 주머니에 넣어서 외우며 다녔다. 시험기간이 나오면 시험 범위를 나눠서 그날 공부할 분량을 계획해서 스케줄을 잡았다. 독서실 책상에 공부 계획을 붙이고 그 날 분량을 꼭 하고 집에 돌아가야지 마음이 놓였다.


내 성적의 반은 부모님이 만들어준 것이다. 내 아이큐는 110으로 지극히 평범했는데, 그리 영특하지 않은 나에게 엄마는 참으로 많은 사교육을 들이댔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할 만큼의 창의력이나 반항기도 없었던지라 모든 과정을 그냥 묵묵히 따라갔다. 사진을 보면 왜 부모님이 그토록 혹독하게 나를 공부를 시켰는지 이해한다. (그 얼굴에 승부 볼 거라고는...)



아빠는 왜 유독 나한테만 그랬을까?


시험 끝나고 TV나 비디오 감상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던 그 시절에 나에겐 사춘기 따위는 없었다. 특별한 취미도 없이 공부만 하던 나에게 딱히 부모님과 부딪힐 일도 없었다. 영원히 순할 것만 같았던 삼 남매의 맏이에게도 사춘기는 왔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하늘 같았던 아빠의 말과 행동에 "왜?"라는 필터가 생긴 것이다. 일단 '왜'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니 모든 일이 다 삐뚤게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적이던 아빠는 유독 나에게만 무척 엄했는데, 특히 해 떨어지고 내가 외출하는 것에 무척 민감했었다.

예를 들면 통금시간이 그렇다. 밤 10시로 딱 정해놓고 9시부터 문자나 전화로 나를 괴롭혔다.


"여보세요"

"어디야?"

"저 지금 가는.."

(뚝. 끝까지 듣지 않고 바로 끊음)


3분 뒤,


"너 어디야 지금"

"지금 거의 다 왔.."

(뚝)


1분 뒤,


"지금 어딘데 아직도 안 들어오냐고"

"아니요.. 가는 중인.."

(뚝)



대학교 때 이미지 정말 구겨버린 사건

  이렇게 한 2-3세트 반복되어 시달리고 나면 심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진다. 아빠의 괴상한 행동은 시리즈로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축제 때였다. 열심히 활동했던 동아리에서 첫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늦어질 것 같아서 회식을 하고 동아리 선배 언니네 집에 자겠다고 엄마를 간신히 설득했다. 마침 아빠가 다른 도시로 출장을 가셨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런데 새벽 2시, 타지에 계시던 아빠가 2시간 차를 몰고 우리 학교까지 달려왔다. 전화 통화 중 엄마의 어설픈 거짓말을 눈치챈 아빠가 엄마를 추궁해 나의 외박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시끄러운 대패 삼겹살 집에서 살짝 취했을 때 즈음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너 어느 술집에 있는 거냐"


  추궁하듯 다짜고짜 화를 내는 아빠와 통화를 마치고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삼겹살 집 바로 앞에 낯익은 차가 바짝 주차를 하더니 아빠가 내렸다. 나는 동아리 사람들에게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얼머무리며 나왔다. 내가 나오자 아빠는 한마디 말도 없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뒤에서 다들 나를 보며 '너 아직 애구나?' 하며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토록 창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좀 더 설명하자면,

하필 그 동아리가 자유로운 스피릿을 갈구하는 락밴드였다는 것.

나는 나름 신비한 분위기를 추구하던 여자 베이시스트였던 것.

그리고 그 날 Metallica와 Skid Row의 곡을 락앤롤 정신 충만하게 연주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장 어디 가서 사고라도 칠 것만 같던 동아리 사람들에게

아빠한테 잔뜩 졸아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달리는 차 안에서 '지금 문을 열고 뛰어내려볼까'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 이후 한동안 우리 동아리 내에 우리 아빠가 '조폭'인 것 같다는 얘기가 좀 돌았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검은 차, 두툼한 체격, 화난 표정, 새벽에 갑작스러운 출동이 버무려진 소문일 뿐이지만)



아빠와 항상 부딪혔던 20대 사춘기


대학교 때 아빠와 나는 참으로 많이 부딪혔다. 엄마는 내가 아빠를 많이 닮아서 그렇다고 했고, 동생은 언니 성질 좀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만 유독 고집스러운 규칙을 고수하는 아빠가 견디기 힘들었다. 나를 좀 놓아줬으면, 그냥 뭘 하던 알아서 하겠지 하고 믿어줬으면 했다. 또 나를 억울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동생들에게는 나만큼 엄격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아빠한테 통금시간 10시, 외박 금지라는 규칙에 고군분투를 한 내 경험을 비웃듯 동생들은 아주 쉽게 외박을 했다. 기가 차고 황당하면서 나의 반항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와서 살고 싶었다. 내 자취방에서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외출도 하고 방도 내 맘대로 꾸미고 싶었다. 통학을 하던 나에겐 자취는 그냥 '야무진 꿈'일뿐이었다. 어쩌다 자취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면 대놓고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뜰날이 있다고 3학년 때 갑자기 나에게 기회가 왔다. 아빠랑 대화를 하던 중에 우연히 한 말이 뜻하지 않은 계기가 되었다. 내가 했던 말은, '학교 가던 중에 졸음이 와서 가드레일을 두 번 스친 적이 있다. 그래서 아빠 몰래 차 수리를 맡기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다 썼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아빠는 화들짝 놀라며 그 길로 바로 학교 근처에 원룸을 얻어주셨다. 신이 있다면 나를 분명 갸륵하고 가엽게 여기셔서 일종의 선물을 하신 건 아니었을까.



그 반항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20대 내내 사춘기였다. 아빠, 엄마의 말뿐만 아니라, 내 전공도 의심스러웠다. 모든 게 다 그냥 곱게 안 보였다. 뭔가 삐딱했던 시절은 결혼을 하면서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거나 엄마 아빠와 눈물의 화해의 시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아이 낳고 복작거리며 살다 보니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참으로 시시한 사춘기의 결말일 수 있겠다. 하지만 조금 상투적인 이유를 좀 들자면 내가 부모가 되고 나니 부모 마음이 좀 이해가 되더라는 거다. (네가 그런 말 할 줄 알았다 하는 독자님 몇 계실 듯. 뻔한데 사실이라 어쩐대요)


내가 내 자식 낳아서 키워보니 나도 '엄마 노릇' 처음 해보는 거라 실수 투성이라는 거다. 나름 배운 여자라고 육아서도 읽으면 팁을 얻기도 하지만 사실 육아의 대부분은 나의 본능과 성격에 기반한다. 그러다 보니 첫 아이를 키울 때에는 포카칩 하나를 먹을 때에도 벌벌 떨었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과자와 사탕을 먹어보고 싶은 아이의 호기심을 어루만져줄 여유가 없었다. 첫애 어린이집 선생님이 오죽하면 일부러 전화를 해서  


"어머니, 현이 소풍 간식으로 과일 말고 슈퍼 과자 좀 사서 보내세요,

애가 다른 애들 과자 먹는 거 보고 많이 먹고 싶어 해요"  


라고 했을까. 아이들에게 무섭게 화낼 때에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될 때도 있다. 쭉 나열하자면 밤을 새울지도 모르는 실수들, 돌이킬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 당시엔 똑같이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부모 노릇은 처음 가본 여행지에서 길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느낌이다.  


나중에 커서 애들이 나한테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고 따질까 겁난다.

사실 그런 식으로 덤비면 이 엄마도 할 말은 없다. 고작 할 변명을 한다면 아마 이럴 거다.


"나도 부모 노릇 처음이라 그래. 실수한 건 좀 봐줘. 그땐 나도 한다고 한 거라니까"


누군가에게 '타이틀'을 갖다 대는 건 무척이나 엄한 잣대를 들이대는 거다. 어떻게 선생님이, 어떻게 공인이, 어떻게 학생이 라고 시작하는 말들은 사실 당사자들에게는 참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도덕성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면 사실 우리는 누군가의 실수를 용인해줄 의무가 있다. 왜냐면 너나 나나 완벽하지 않은 그냥 보통 사람이니까.




'아빠'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빠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빠'라는 타이틀을 떼어버렸을 때였다. 아빠도 지금 내 옆에 있는 신랑 같은 '그냥' 남자였다. 대학생 딸은 처음이니까 잘 몰랐을 것이다. 실수할 수 있는 남자로 아빠를 바라보면 '사이코' 같던 행동도 달라 보인다. 교복을 벗고 화장을 하고 나가는 큰 딸을 두고 노심초사하며 다른 늑대 같은 놈들로부터 딸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소싯적 인기 좀 많았다는 아빠야 말로 늑대 중에 늑대였으니, '늑대' 심리 누구보다 잘 아는 아빠는 그만큼 필사적이었을 테다. 그래. 그러고 보면 남자란 죄다 믿을 거 못 된다고 침을 튀기며 말하시던 모습도 이해가 간다. (그 당시 자기도 남자면서 세상을 저리도 부정적으로 본다며 '속으로' 아빠를 비난했다) 목소리도 유독 커서 더 강해 보였던 아빠는 겁이 많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졸음운전으로 가드레일을 긁었다는 말에 바로 자취방을 얻어준 것도 딸이 늑대 소굴에 들어갈지 언정 교통사고 나는 것 보다야 낫다는 판단에서 바로 행동에 옮긴 것인 것 아닐까.


아빠는 나를 사랑했다.

'미저리'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장면들로 가득했지만 나를 많이 사랑했던 거다.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 마음이 어렴풋이 보인다.

나를 다룬 방법에 세련미가 좀 부족해서 아쉽긴 해도

어쩌겠나 아빠의 성격이 그런 걸.


내가 지금 부모 된 지 5년 차로서 소감을 잠깐 말하자면,

아직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제때 밥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중에 자식이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너그러운 눈으로 엄마를 아빠를 봐줬으면 좋겠다.  

난 부모님과 좀 다르고

지금 내 자식들한테 잘하고 있다고 해봤자,

(미혼이라면 난 내 자식한테 잘할 거라고)


걔네들...

나중에 분명 딴소리할 거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원래 그런 거다.





+


아빠,

아빠 욕만 잔뜩 써놓은 것 같은데

사실 쓰면서 몇 번 울컥했어요.

사랑하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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