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9.9.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보다가 만 사람은 없다는 드라마
시작은 사소했다. 주말에 시댁에서 애들 재우고 TV 좀 볼까 했었다. 누군가 재밌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서 '시그널'을 골랐다. 앞부분 좀 보다 시원찮으면 바로 꺼버릴 요량이었다. 소파에서 비스듬히 누워서 시그널 1회를 틀자 '응답하라'에 나올법한 음악이 흘렀다. 하지만 3회 정도 볼 땐 티브이 바로 앞에 앉아 바짝 긴장해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슬아슬할 때마다 종이라 살을 꽉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새벽 4시. 시골 가는 날엔 일찍 일어나시는 아버님이 깨어나실까봐 할수없이 TV를 꺼야 했다.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관절이 뻐근했다. (다음 날 아침 아버님께서 '어제 늦게까지 티브이 본 녀석이 너냐?' 하며 신랑을 채근했다)
시그널 앓이, '세 시간 반'.
드라마의 소재가 신선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훌륭했다. 배경음악으로 장범준, 김윤아의 보이스까지 간간히 들리니 금상첨화였다. 게다가 한 달 내내 추리소설에 빠져있었으니 개인적으로 참 시기적절한 드라마였다. 이렇게 흠뻑 빠진 드라마는 2년 전 '덱스터'가 마지막이었는데. 오래간만에 '시그널' 앓이를 했다. 결혼 전이야 주말에 맘 잡고 드라마 1 시즌 정도는 거뜬하게 해치웠건만, 지금 내가 누군가, 아이 둘 애 엄마. 밤에 한편 보기도 버거웠다. 점심시간에 30분, 밤에 1시간씩 짬짬이 드라마를 봤다. 그렇게 근면하고 착실한 청취 생활을 며칠 하다 보니 16편의 드라마 중 단 3편 만이 남게 되었다.
구하는 자에게 길이 있다고 했던가. 주말에 결혼식이 있어서 미뤄오던 파마를 하기로 했다.
미용실에 예약 전화를 걸었을 때다.
"뿌리 염색이랑 파마하려면 얼마나 걸려요?"
"네, 고객님. 한 3시간 반 정도 예상하시면 됩니다."
"세 시간 반이요? 오래 걸리네요. 퇴근하고 바로 갈게요. 6시 30분으로 예약해주세요 "
'세 시간 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다)
3편을 넉넉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건 분명 미용실로부터 온 '시그널'이었다.
남은 드라마를 바로 그곳에서 해치우라는 신호.(무전기만 없었을 뿐이라고요)
미용실에서 '시그널' 보기
퇴근 전에 한복 아가씨한테 이어폰을 급하게 빌렸다.
핸드폰 인터넷 창에 동영상도 일시정지해서 준비해두었다.
미용실에 입장하자마자 계획대로 진행했다.
진 선생님께 내 머리를 온전히 맡기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화면에 빠져들었다.
머리에 염색약을 칠할 때, 파마를 말 때, 샴푸 할 때에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샴푸 할 때 핸드폰 들고 보는 거 은근 팔 저림)
악역의 파렴치한 행동에 입술을 깨물었다.
추격씬에서는 자꾸 허벅지를 꽉 잡고 손에 힘을 주게 되었다.
쩜오 김혜수의 절절한 대사에 목이 매였다.
콧물이 살짝 맺힌 것 같아 가운 소매로 슬쩍 훔쳤다.
세 시간 반 동안 대망의 마지막회까지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한 동안 드라마는 좀 쉬어야겠다.
정말 재밌었던 것은 맞는데
입술에 살짝 피도 맺히고 팔도 저리고 허벅지도 아프고 귓구멍도 얼얼한 게(이어폰 탓)
몸이 좀 힘들다.
참, 그리고 '시그널'은 시즌2가 나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