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6.
내 앞자리 여자애
사람의 인연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고 3 때 내 앞자리에 예체능으로 입시 준비를 하던 애가 있었다.
그 당시 떡꼬치를 같이 사 먹으러 가던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뒷담화를 깔만큼 막역하지도 않았고,
아주 가끔 그 친구가 수학 문제를 물어보면
나름 문과생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열심히 가르쳐 주긴 했다.
오히려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친구와 더 돈독해진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아주 개인적이고
조금 이상한 부탁이었다.
"야, 있잖아. 너네 언니 대학생이지? 얼굴에 바르는 건 어디서 쓰는 게 좋대?"
주위에 아는 언니도 없었고,
그렇다고 요즘처럼 '더 얼굴 샵' 이 널린 것도 아니고,
잡지를 봐도 뭔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하지만 화장을 하고 싶은 욕망은 차고 넘치던 신입생의 봄이었다.
게다가 그의 언니는 다름 아닌 '미대생'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 친구의 대답.
"우리 언니가 그러는데, IPKN 팩트가 좋대"
그렇게 해서 나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대학생 언니의 친절한 조언으로
고상하기 이를 데 없는 진초록 케이스의 팩트를 구입했다.
그것이 내가 산 최초의 화장품이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친구는
홀연히 독일로 유학을 갔다.
상당한 물리적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자주 국제전화를 했다.
밤 11시에서 새벽 2시까지,
때로는 새벽 1시에서 3시까지
어차피 남자 친구도 없었던 우리는
우리의 주변인에 관해,
그리고 개척해야 할 미래에 관해,
쉴 새 없이 떠들고는 끊을 때는 못내 아쉬워했다.
유럽 배낭여행에 그녀가 살던 만하임을
독일 여행의 일정에 넣었었다.
이후에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닐 때엔
나는 아예 짐을 싸서 몇 달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다.
(집세도 안 내고 몇 달을 눌러앉았던 것은. 진심 무개념)
우리는 Atomic Kitten 뮤직비디오를 같이 보며 흥얼거렸고,
당시 유행하던 '파리의 연인'을 숨죽여 봤다.
수영장에 다녀오는 길에 갓 나온 크루아상에 감동을 하고,
돈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 MANGO 매장을 몇 바퀴 돌며 아이쇼핑만 하고,
한 침대에 누워 수다를 떨다 새소리에 깜짝 놀라 동이 트기도 했다.
그녀는 스위스 남자를 만나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나도 한국에서 내 보금자리를 찾았지만,
'카카오톡'이 있는 좋은 세상에 사는 덕분에
서로가 그립다기보다는
마냥 친근하기만 하다.
친정을 찾아 가끔 한국에 오는데,
일단 우리 집에 오면 고등학생 빙의되어
목이 쉬도록 수다를 떤다.
그녀가 2주 전에 아들과 한국에 왔다.
저번 주 토요일에 우리 집에 왔었다.
며칠 묵었다 갈 요량으로 짐가방도 무척 묵직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명목으로,
나의 첫 화장품을 가르쳐준 언니도 잠깐 들렸다.
너무 반갑고 설레어야 할 순간에,
나는 사실 친구의 양말에 토를 하진 않을까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 먹어 식중독에 걸린 상황이었다.
10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친구와 언니는 안절부절.
정말,
차라리..
꿈이길 바랬었다.
몇 년 만에 극적으로 만난 친구를 30분 만에 돌려보내고
그날 끙끙 앓아누워 울었다.
누군가 내 선물상자를 빼앗아 버린 기분에
내내 우울했다.
하지만 누굴 탓하리....
아이고
내 팔자.
ㅠㅠ
+
내일 그녀를 만나러 내가 간다.
일요일부터 시작된 우울증은 조금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