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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May 06. 2016

매년, 입을 옷이 없는 이유

2016. 5. 5



크루아상을 좋아하시나요?


  크루아상은 페스츄리계에서 도도함을 뽐내는 녀석이다. 초승달 모양의 자태 하며 (우리 동네 빵집에선 마름모 모양으로 주로 만들긴 하지만), 살짝 그러데이션이 들어간 색감도 고급 진 데다가, 잼이나 앙금, 크림 따위는 일체 거부하는 시크함을 겸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정말 맛있는 '크루아상'을 찾기란 제대로 된 평양냉면집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크루아상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배낭여행 중에 머물던 파리 도심 한 복판의 빵집 때문이다. (심지어 매우 붐비는 지하철역 근처에 있었다) 민박집 사장님은 아침 8시 조금 넘어서 그 빵집에서 꼭 크루아상을 사 먹어보라며 가는 길을 설명해주었다. 사장님의 친절한 설명 따위는 애초부터 쓸모가 없었는데, 우린 마치 만화 속 주인공들이 하늘에 붕 떠 침을 질질 흘리며 냄새에 끌려가 듯 그곳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원래 길을 잘 찾기도 하지만 정말 냄새로 찾았다니까. 왜 아무도 나를 안 믿는..) 고소함이 지나친 듯한 버터향과 달콤하면서도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빵 냄새는 환상적이었다.(30일이 넘는 일정에 배고프고 지친 배낭여행객에게는 더욱더!) 직장인들, 동네 주민, 나 같은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파리 시내의 빵집의 아침 풍경은 생경했지만 그곳 주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어 왠지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2유로 조금 넘는 크루아상은 갓 나왔음을 인증이라도 하듯 따뜻했고, 무척이나 몰랑몰랑했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내 동생과 나는 'I am in the heaven' 표정에 서로 신음소리를 번갈아 내며 전율을 느꼈다. (신음소리를 내며 음식에 감탄하는 모양새에 내가 원래 과장이 심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맛은 진심 훌륭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하하하)


  한 개로는 당연히 부족하고 2개 3개까지도 연거푸 먹어도 느끼함이 없는 빵 맛을 설명하자면, 노르스름한 겉면은 얇고 바삭하면서도 안에 빵의 결들이 쫀쫀하게 살아있어 우아하게 결이 찢어진다. 그리고 빵 봉지에도 기름이 흥건하게 묻을 정도로 버터가 아주 많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먹고 난 뒤에 입맛이 깔끔하다(고 하면 내가 역시 과장이 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빵을 맛본 이후로 나의 미각을 담당하는 우두머리 중 하나가 '크루아상이란 녀석을 보면 일단 침을 흘리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때 맛있게 먹었던 빵맛은 지금까지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크루아상을 맛있게 먹는다.(아메리카노를 곁들면 그 순간은 나도 파리지앵) 완전히 똑같은 맛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맛과 모양은 내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기엔 충분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아예 습관적으로 그 빵을 고르긴 하지만... (혹시 괜찮은데 어디 없나요?)




예전에 자주 했던 핀이 하기 싫은 이유


  이번에 파마할 때 조금 층을 내달라고 했더니, 조금 긴 듯한 앞머리가 생겼다. 귀에 간신히 꼽히기는 하는데, 좀 있다 보면 어느새 빠져나와 왼쪽 눈 앞으로 흘러내린다. 헤어 핀을 꽂아볼까 하고 서랍을 뒤졌다. 잘 안 쓰는 서랍에서 몇 년 전에 매일 하고 다니던 집게핀을 찾았다.

 

  갈색 리본에 샤넬 로고 큐빅이 박혀있는 이 핀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집게핀 치고 얇고 긴데다 튼튼해서 내 머리숱을 잘 감당해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뒷자리에 앉아 내 머리를 종종 묶어주던 친구는 '줄다리기 밧줄을 잡은 것 같다'라는 제법 여고생다운 시적인 비유를 하곤 했다) 그 당시 출산 한지 얼마 안돼 타도시로 이사를 하면서 육아 독립군 대열에 막 합류한 상태였다. 아침마다 세수를 하고 칫솔꽂이 옆에다 아무렇게나 놓아둔 핀을 비장하게 꽂곤 했었다.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아이 얼굴에 머리카락이 닿지 않게, 아기 이유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핀의 미적인 측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에서 꼭 필요했다.


  집 근처 '자연드림'유기농 매장에 가는 길에 있던 보세 옷가게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핀부터 그 당시 옷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아이를 맡기고 어디 가서 쇼핑하기도 뭐하고, 출산 후 살이 좀 남아있어 좀 값나가고 좋은 옷을 사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애매모호한 시기였다. 당시에 애용했던 치마레깅스라던가 스웨터, 셔츠 등은 예전에 몽땅 버렸는데, (그 중 멀쩡한 옷은 동생이나 친구에게 선물했다) 그 옷을 입으면 힘들고 지쳐있던 나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싫었기 때문이다. 오늘 찾은 그 갈색 리본 핀은 급한 대로 조금 하고 있다 영 맘에 안 들어 빼버렸다. (나름 '육아 독립군'을 상징하는 핀인데, 이젠 친정부모님의 도움 없이 키워보겠다며 서울로 아이를 데려간 올케에게 줄까?)




개인의 취향이라는 건 어쩌면


  지인의 남편은 그녀가 특정 레깅스만 입으면 벗으라고 한다나...(이상한 상상하시는 거 아니죠?) 그 이유는 둘이 다투고 냉전 기간을 갖던 중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녀가 당시 자주 입던 바지라서 자꾸 안 좋은 기억이 생각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의 남편이 레깅스만 보면 지었을 찝찝한 표정을 상상하면 귀엽기도 하고 공감이 간다. 오래전 하와이에서 샀던 비치용 드레스를 아직도 못 버리는 것은 그 추억들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맛이 좀 떨어지는 크루아상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빵 쟁반에 옮겨 담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 모른다.


  나의 취향이라는 것이 어쩌면 고작 사소한 경험에서 내린 결론들 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내가 시시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임신 중에 입었던 재킷은 어지간히 맞는 듯해도 다시 입기 싫다. 입덧을 한창 할 때 그나마 먹을만했던 '참크래커'와 '에이스'는 지금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시절 자주 했던 핀을 하기 싫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신혼여행지에서 샀던 쓸 때 없는 나무로 된 물고기 모양 냉장고 자석은 아직도 차마 못 버리겠다. (다들 그런 것 좀 있지 않나요?) 나와 친했던 친구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에겐 조금 더 호감이 간다. (심지어 이름이 같으면 더 그렇다)

  

  매년 입을 옷이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지난 기억들이 묵은 옷의 섬유속에 촘촘히 스며들어서이다. 윤종신의 '내 사랑 못난이'를 들으면 중학교 학창 시절이 떠오르고, (내 생에 첫 콘서트는 '종신이 오빠 콘서트'였다)  박정현의 데뷔곡 '나의 하루'를 들으면 독서실에서 워크맨의 이어폰을 꼽고 있던 내가 떠오른다. MIKA의 'Life in cartoon motion'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들으면 신랑과 연애했던 기억들에 날개가 돋쳐 주위를 날아다닌다.(음악 얘기는 끝이 없이 나올 듯...) 노래의 멜로디에 나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왠지 다 늙은 노인들의 초라한 푸념 같아 싫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자꾸 노래든, 옷이든, 핀이든 아주 사소한 것들에 지난 기억을 들춰보게 된다.


그래서 점점 더 취향이 확실해지고 까다로워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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