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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May 07. 2016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전 매력

2016. 5. 6



반전의 매력

 

    내 기억 속 첫 반전 영화는 '유주얼 서스펙트'였다. 요즘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가 워낙에 흔해졌다.  90년대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반전'의 수준이라곤 '주인공이 적이 너무 강력해서 죽겠구나 싶었는데 극적으로 적을 무찌른다' 정도였다. (또는 '적이 주인공의 얼굴에 총을 쏴서 탕 소리가 났는데, 사실은 뒤에서 주인공의 친구가 적의 등에 총알을 박은 것이었다. 눈도 채 못 감은 악당은 황당한 표정으로 앞으로 고꾸라진다' 이런 것도 많았지) 그 시절에는 이 장면 마저도 숨죽이며 보기에 충분했거늘,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케빈 스페이시)가 절둑거리며 걷다 갑자기 멀쩡하게 걷는 장면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스팔트의 회색 길에 카이저 소제의 다리만 클로즈 업해 보여준다.) '인디펜던스 데이'나 '아마겟돈'처럼 미국이 지구를 구하는 영화를 보고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여중생에게 전체적인 스토리가 엎어지는 반전은 신선하다 못해 충격이었다. 그 이후로 '식스 센스'와 같은 반전 영화가 히트를 치면서 그런 류의 영화는 흔해졌다. 지금은 너무 스토리를 뒤집으면 식상하기까지 하다.


  영화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는 '반전 매력'이 있는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예를 들면, 공부 안 하고 놀게 생긴 날라리가 알고 보니 전교 1등이라던가,

얼굴이 엄청 예뻐서 참 도도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구수한 옆집 아줌마 스타일이라던가.

참 빈티 나게 생겨서 같이 다니기 뭐하였는데 사실 아빠가 중소기업 사장이시라던가,

철딱서니 영 없어 보이는 녀석이 알고 보니 알바 두세 개 뛰어가며 학자금을 마련하는 진국이었다 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무척 흥미를 느낀다.

(쓰고 보니 아침 드라마에 다 나올 법한 캐릭터...)


반전을 좋아하는 취향은 옷을 고를 때에도 반영된다. 예전에 우연히 SISLEY 홍보물을 보다 푸른색 원피스에 꽂혔었다. 에메랄드와 코발트색을 섞어놓은 색에 적색 꽃무늬가 작게 들어간 민소매 원피스였다. A라인 치마가 소녀 같은 느낌마저 풍겼다. 하지만 이 옷의 치명적인 매력은 뒷부분에 있었다. 원피스 뒷 면을 보면 허리 부분이 오픈되어 있어 타원형으로 길게 피부가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었다. (다소 실망하셨나요? 등이 완전 다 파였거나  엉덩이 골이 보여야 했나) 소심한 성격에 자주 못 입을 것 같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분명 들었지만 결국 감정적인 소비를 하고야 말았다.('합리적인 소비'가 뭐예요?) 여름휴가 때나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 되어버렸지만 지금도 그 옷의 매력은 유효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력



몇 주전 남동생에게 책 3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집이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이렇게 총 세 권임 )

무라카미 하루키가 '앙앙'이라는 일본 여성 잡지에 몇 년 동안 연재한 것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다. 한 주제당 2-3페이지 남짓이라 사탕까먹 듯 간간히 읽기에 좋다. 그의 베스트셀러 '상실의 시대'는 읽은지 하도 오래돼서 줄거리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금방 쓰러질 듯한 여주인공에게 매료되어 왜 나는 창백하고 가녀린 맛이 없는지 한탄했던 기억은 난다. 그만큼 그 소설의 필체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달하면서도 몽환적이었다.


내가 선물 받은 책은 에세이다 보니 소설에서 받은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글이 다양한 주제에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형식이라, 하루키 아저씨와 무척 친해진 기분이다.

최근에 신랑에게 책의 일부를 찍어 카톡을 보냈다.

"오빠랑 하루키 아저씨랑 할 얘기가 좀 있을 것 같은데?"

라는 말도 함께 덧붙여서,


이 글은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중 '불테리어밖에 본 적 없다' 중에 나오는 글인데,


부인이 화를 낼 때 대처하는 하루키 아저씨의 현명한 대처법을 엿볼 수 있다.




... 전반적인 여성에 대해 오랜 세월 품어온 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여성은 화내고 싶은 것이 있어서 화내는 게 아니라, 화내고 싶을 때가 있어서 화낸다'라는 것이다.





.... 신혼 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횟수를 거듭하는 동안.... 그 구조를 알게 됐다. 상대(여자)가 화를 내면 방어는 단단히 하되, 얌전히 샌드백이 되는 수밖에 없다. 자연재해에 정면으로 맞서 봐야 어차피 이길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뱃사공처럼 그저 목을 움츠리고 뭔가 다른 생각을 하며 무지막지한 태풍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불테리어밖에 본 적 없다' 중-




이밖에도 그의 오래된 레코드를 수집하는 취미라던가,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 등이 나온다.

라디오를 듣는 기분으로 에세이를 읽다가 저자 소개에 실린 그의 사진을 한참을 본다.  

흑백 사진 속에 그는 재미없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같다.

쌍꺼풀 없는 눈에 짧은 머리는 고집이 있어 보여 화도 잘 낼 것 같다.(저자는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이라고 했습니다만)


설렁탕에 깍두기 푸짐하게 말아 땀 흘리며 드실 듯 한 생김새에

이런 섬세함과 부드러움이라니...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반전 매력'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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