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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Sep 17. 2017

근사한 사진을 찍었다

2017.9.16.

사진을 찍다 보면 가끔 
우연과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어제가 그랬다. 

소방 대피 훈련으로 전교생이 실내화를 신고 운동장으로 대피를 했다.

시나리오대로 중앙현관에 실제상황을 연출하는 작은 불을 피우고

소화기로 불을 끄는 상황까지 진행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빗자루와 삽이 담긴 리어카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시나리오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리어카를 끌고 가 불이 꺼진 잔해를 처리한다.'


리어카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면서 

나는 머릿속이 살짝 심란했는데 그 이유는

오늘 소방훈련에 적합하지 않은 복장 때문이었다.


연분홍 시폰 주름치마에 진초록 블라우스

게다가 이 블라우스 소매단은 

스카프처럼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얼핏 보면 한복 같기도 한 이 복장이

혼자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내 리어카 옆에는 소방차가 대기 중.

나는 이 소방차가 물을 학교 건물에 잔뜩 뿌리면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학교에 진짜 소방차가 떡하니 들어와 있으니

뭐라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잠깐 진행자의 방송이 나오고

빨간 소방차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방관이

호스를 조준해서 학교 쪽으로 긴 물줄기를 쏘았다.


물줄기는 학교 4층 건물까지 무지개처럼 뻗어나갔고,

그 주변으로 물이 비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졌다.

리어카 옆에서 넋 놓고 있던 나는 

수돗가 차양막 아래로 가서 소방비(?)를 피했다.


그리고 이 몹쓸 감성이 돋으면서 

소방차 호스가 만들어내는 이 장관에 

아주 살짝 목이 매였다.

(죽기 전에는 고치고 싶다. 이 앞뒤 맥락 없는 감성... 에혀)


불이 나면 소방관 아저씨가 

이렇게 많은 물을 싣고 와서 뿌려준다니.

어찌나 든든하고 감사하고 멋진지...


나는 뭔가에 이끌린 듯

리어카 손잡이를 내려놓고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소방차 퍼포먼스는 끝이 났고 

나는 다시 정신줄을 다시 잡았다.


'이제 내 차례야!'


주변에 보이는 선생님께 내 핸드폰을 황급히 맡기고

나는 리어카를 끌고 샤랄라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소화 현장으로 내달렸다.


달리기 직전까지는 복장이 많이 신경 쓰였는데,

막상 내 몫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대역죄를 진 것은 아니니까.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 위안하며

교실에 돌아와 아까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만화책이나 소설에 가끔 이렇게 나오던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가 숨을 하아... 하고 내뱉었다.'


내 느낌을 표현할 감탄사가 

이리도 상투적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정말 내 입술사이로 정말로


'하아'


가 나왔다.





근사한 사진을 찍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굉장히 맘에 들어서 학생들에게도 보여줬다.

(가을 하늘 너무 예쁘지 않니. 같이 하늘 좀 보자. 하며 별 호돌갑을 다 떨음.)


내가 사진을 잘 찍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애정 하는 사진을 건질 때가 있다.

딱히 이렇다 할 센스와 기술이 없는 나로선

이런 사진이 나오면 무척 뿌듯하다.


기막힌 하늘색과 선명한 소방차의 빨강의 대비.

게다가 저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

그리고 늠름한 소방관 아저씨의 귀욤 돋는 노랑 소방복까지.

너무나 그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괜찮은 사진을 건지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바로 그 타이밍을 아는 것.


비록 리어카 손잡이를 

어정쩡하게 들고 있어도 말이다.





+


그래 봤자. 


식당에서 음식 나오면 정신 못 차리고 먹다가

"아, 이거 사진 안 찍었다"

라고 말하는 게 일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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