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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May 13. 2016

동네에서 아줌마로 살아남기

2016. 5. 12.




  얼굴만 아는 사람 & 그냥 아는 사람


  동네 아줌마로 지내기란 무척 피곤한 일이다. 특히 나처럼 소심하고, 잡념이 많은 성격이면 더욱 그렇다. 직장에서는 집단내의 나의 소속에 관련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 된다. 직장 내에서 얼굴만 안다던가, 아주 가끔 보는 사이라면 회식자리에서 몇 마디 나누면 될 터였다. 하지만 동네에서는 이 경계가 참 모호하기 짝이 없다.


  작년에는 아이가 오전 9시 10분에 유치원 버스를 탔는데, 아파트 정문까지 걷다 보면 딱 그 시각에 마주치는 얼굴들이 있다. 특히 나처럼 아이 등원을 위해 나와있는 엄마들이 그렇다. 아는 사람은 분명 아닌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해진 시간에 보니 얼굴이 자연스럽게 익혀진다. 심지어 아침에 나왔는데 그들이 안 보이면 뭔가 쎄해지면서 유치원 버스를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특별히 아는 사이는 아닌데 얼굴만 익숙해지다 보면 길에서 마주쳤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해버릴 때가 있다. (하고 나서 아차. 그리고 무척 무안해짐) 상대방도 멋쩍어서 인사를 받아주긴 한다. (그러면 다음엔 인사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요?) 수퍼에서 우연히 눈이라도 마주치면 서로 모른척 하는 것도 매번 나를 애매한 기분으로 만든다.  


  사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연히 기회가 되어 서로의 기본정보를 교환하고 아는 사람이 된 경우이다. 어린이집 행사나 유치원 체육대회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따로 커피를 마신다던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는 절대 아니지만, 혹시라도 같은 장소에 10분이라도 있으면 분위기상 가벼운 대화를 조금 해야 한다. 아이가 못 본 사이 많이 컸네.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였어요?  아이는 그 유치원 잘 다녀요? 등등... 멘트는 그 상황에 맞게 그때 그때 수급한다. 적당한 주제를 찾는 것도 일이다. 그냥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있자니 괜히 침묵이 어색해서 자꾸 말을 하게된다.




 

동네 아줌마로 지내기란 만만치 않다



  오후에 아이 데릴러 갈 시간에 맞춰 모처럼 유치원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올해 유치원은 집 근처) 가는 길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가려는데 쓰레기장 근처 놀이터에 둘째 어린이집 소풍 때 만난 엄마 둘이 보인다. 알아봤다는 신호로 환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분리수거를 했다. 그리고 다시 갈 길을 가려는데 뭔가 나에게 말을 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거리는 너무 멀고 나는 시간에 맞춰 가야 하니 급하다. 그렇다고 내가 "나 지금 아이 데리러 빨리 가야 돼요!"라고 소리를 치기도 그랬다. 짧은 순간에 고민을 조금 하다가 역시 아리송한 기분으로 유치원으로 향했다. 나로 인해 마음이 상한 건 아닌지, 차라리 그냥 가까이 가서 인사를 좀 하고 올 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트리플 A형. 소심 of the 소심)


  유치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엄마와 폭풍 수다 떨며 가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장난치며 뛰고 잡고 정신이 없었다. 몇 미터 앞에 우리 아이와 같은 반 친구 아빠가 보였다. 어떻게 딱 알아봤냐면, 그분은 외국인이라 눈에 정말 잘 띈다. 뇌가 인지 하는 영역이니 내가 남에 집 신랑한테 다른 사적인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고 쓰면서 이정도면 내가 소심한 게 아니라 혹시 정신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동네 놀이터에서 자주 봤는데,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가볍게 인사를 잘한다. 내가 뒤에 있으니까 날 못 보겠지 하고 걸어가는데,

"어! 저 외국인이 자기한테 인사했는데, 못 봤어요?" 하고 옆에 있던 엄마가 말해줬다.

무안했겠다 싶었다. 마침 횡단보도가 빨간불이 되었다. 다 같이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라 내가 다급하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내 미안한 마음을 덜었다. (나란 인간... 정말 지친다.)


   예전에 개콘에서'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이 있었는데 '동네에서 아줌마로 살아남기' 이런 것 좀 한번 딱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동네에서 얼굴 10번 이상 봤으면 가볍게 인사하는 겁니다. 한 번이라도 같이 밥 먹었으면 '아는 사람' 되신 거에요. 그러면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셔야 해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밥 먹은 지 1년 지났으면 어떻게 하냐? 그런 경우는 인사 안하는 겁니다. 이 경우는 유효기간이 지난 걸로 보는 겁니다. 인사했는데 못 봤으면 못 본 사람이 잘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다시 인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동네에서 아줌마로 살아남기' 의 진정한 고수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층이나 같은 라인에 사는 집들에 대해선 속속 들 히 알고 있었다. (수자원 공사 다니는 집, 보청기 사장 집, 소아과 하는 집, 약사 집, 애들 둘다 고등학생인 집, 맨날 나와서 담배만 피우는 아저씨 집) 엄마는 그중에 친하게 지내는 집이 한두 집은 꼭 생겼는데, 그러면 '앞집, 7층, 13층'이라고 간단하게 줄여 말했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 903호에 있어'라는 메모지가 심심치 않게 식탁에 놓여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어머니 회장은 도맡아 하셨고, 고등학교 때에는 각 교실에 에어컨을 놓겠다고 밤마다 다른 집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후원금을 모았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거의 모든 사람과 인사를 하고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 둘째 아이 낳고 몸조리할 때, 엄마가 큰 애를 데리고 놀이터라도 갔다오면 "야, 너 oo엄마 아니? 그 엄마 만났다 얘!"라고 말하기는 다반사였다.


 

어릴 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일들인데,

오랜 기억들을 더듬어보니, 우리 엄마가 갑자기 진정한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엄마에게서 나 같은 딸이 나온 것도 조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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