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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May 27. 2016

엄마는 엄마고, 아내는 아내다.

2016. 5. 26




그냥 태현이 엄마로 저장해주세요


  육아휴직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동네 아줌마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도 아니고, 직장에 소속도 안된 그냥 여자가 되어본지가 얼마만인지. 당장 아침 8시30분까지 후달리며 도착해야하는 직장이 없다는 사실에 내심 해방감마저 들었다. 동네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편한 아이 엄마롤 대했다. 기한 내에 결제를 맡아야할 일도 없고, 꼭 참석해야할 회의도, 출장도 없었다. 아이들과 놀이터, 커피숍, 마트를 수시로 드나들며 가정에서의 내 역할을 하는 것에 소소한 보람을 느꼈다.     


큰 아이 어린이집 입학식 때였다. 같은 반 엄마들끼리 인사를 하고 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니 진정 학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헤어지면서 한 엄마가 전화번호를 교환하자고 하자 다들 '저도요. 저도' 분위기가 되었다.     


"전화번호 여기 찍어주세요. 저장은 제가 할께요"     

"(내 핸드폰에 전화번호 찍어줌) 여기요"     

"저장해야겠다. 저기 이름이...?

"네? 아...(멋적은 웃음) 그냥 태현이 엄마로 저장해주세요"               


초반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하고 물어보곤 했다, 그런데 흔쾌히 대답을 하기보다는 새삼스럽다는 듯 쑥쓰러워하는 반응이 많았다. 대부분 'oo엄마'로 불리우길 자처하는데, 아이라는 공통 분모로 모인 곳에선 더 자연스럽고 실용적인 닉네임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는 조금 전략을 바꿔서 말이 좀 통할 것 같은 엄마를 만날 때만 이름을 물어본다. 할아버지를 '마이클!', 할머니를 '린다!'하고 친구처럼 부르는 문화는 아니지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곳이 몸이 아파야 가는 병원과 마트에서 휴대폰 번호로 포인트 적립할 때 뿐이라면 너무 서글퍼지기 때문이다.     


아줌마들 대화에서 동네 누군가를 설명하기 위해 신랑의 직업도 자주 등장한다.

     

"103동에 아빠가 경찰인 집 말하는거지?"     

"그 집 아저씨 SK다니잖아"     

"내가 알지. 신랑이 중장비 기사하고 그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 나의 이름은 모른채 내 아이와 신랑의 직업으로 나를 기억한다고 생각하니 삭막했다. 내가 뭐를 좋아하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무한 반복해서 즐겨듣는 음악은 뭔지에 대해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감히 그런 주제를 입 밖에 낼 수 없다.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괜히 잔뜩 바람이든 여자처럼 보일까 싶어 조심스럽다. 내가 요즘 파울로 코엘료 소설에 푹 빠져있는데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면 괜히 잘난척 하는 것 같아 참게 된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육아 휴직이 당초 계획보다 길어지면서 나이 서른살 넘어서 '중2병'이 찾아왔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와 같은 물음표가 머리속을 맴돌았다. 정체성 혼란의 시기였다.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상이 계속되며 신랑에게 냉소적으로 이런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오빠, 사실 여자들은 가방끈 짧은게 나아. 애초에 이렇게 애 낳고 밥하고 빨래하는 줄 알았으면, 머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대. 옛날 어르신들이 여자들은 덜 가르킨 거. 그거 다 이유있는 거였어. 열심히 대학나와서 어엿한 사회의 일꾼이 되라할 땐 언제고, 결국 결혼하고 엄마가 애 키우는게 우선이잖아."

(그때 제 상태가 안 좋아서... 여성분들 죄송합니다)                


올해로 육아 휴직 5년차. 이제 누구의 엄마로, 머 하는집 아내로 통하는 세계에 어느 정도 적응은 했다. 직장에서 일하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낯설기까지 하다. (아예 감을 잃은 것 같다)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것 처럼 '엄마는 엄마고, 아내는 아내이다'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요)


이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싶은 날이 가끔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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