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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숑로제 Apr 23. 2016

귓밥으로 꽉 막혔다.

오지랖 떨기부터 적당한 거리찾기까지




야, 너는 머리 하나로 딱 묶는 게 더 이뻐!


본인은 괜찮다는데 내가 안달이 날 때가 있다.

아이 귀를 우연히 봤는데 귓밥이 손에 잡힐 듯 꽉 차있을 때.

신랑 머리위에 은빛 머리카락 한 가닥이 나에게 손짓할 때,

핑크빛 원피스를 곱게 입은 딸이 흙 묻은 운동화를 신어버릴 때,

'으....'

정말이지 참기 힘들다. 


나의 엄마도 그랬다. 

데이트를 앞두고 공들여 단장을 하고 나가는 나에게

엄마는 항상 "야, 너는 머리 하나로 딱 묶는 게 더 이뻐!"라는 말로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곤 했었다.

당시 나는 '남자들은 대부분 긴 생머리는 좋아한다'라는 마음속의 어떤 믿음이 있었는데다

혼기가 꽉 찼을 때 하는 연애라서 엄마는 나보다 더 꼼꼼하게 내 스타일을 점검하려 했다. 





내 인생 최대의 오지랖

내 인생에서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을 떨었을 때가 기억난다.

대학교 4학년 때, 동갑내기 친구 B양이 말도 제대로 못 이을 정도로 꺼이꺼이 울며 전화를 했다.

"흐으흑...지금 나올 수 있어?" 

"나 지금 씻고 나왔는데, 너 울어? 무슨 일이야?"

"나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아. 흐흑"

당시 B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9살 연상의 남자와 5년 연애 후 결혼 준비 중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쪽 집안에서 반대가 심해서 맘고생을 좀 하던 차였다.

"내가 지금 바로 나갈게. 우리 집 앞에 공원에서 만나"

사정을 들어보니 혼수 준비도 끝나가는 판에 남자 쪽 집이 너무했다 싶었다. 

(자세하게 쓰고 싶지만 그러면 이 글은 '사랑과 전쟁'이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같이 부둥켜안고 울고 불고, 

흥분해서 큰 소리로 욕도 실컷 같이 해주고, 

심지어 내가 그 남자한테 전화를 좀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쯤 해서, 이게 다인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날 밤 우리를 봤다면 이해할 것이다)

얼마 뒤 그 둘은 결혼했고, 내가 부케를 받았다. 하지만 신랑분을 볼 때 민망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남의 연애사에 참견은 최대한 자제한다)  






 적당한 거리 두기


상대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일종의 '의리'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집중이 잘 안될 때마다 잘하고 있는 여동생을 꼬셔서 독서실 휴게실로 유인하곤 했다.)

또는 '너에게만 말하는 건데...' 하고  뭔가를 공유하는 것이 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든다고 믿었던 적도 있다.

나의 정돈되지 않은 날 감정들을 모두 내비쳐 보여주면서 내가 솔직하고 진솔한 사람인양 착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다.

늙어서 일수도 있지만 오지랖의 쓰디쓴 최후를 여러 번 맛본 뒤일 수도 있겠다. 


육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 두기는 유효하다.

아직 내가 챙겨줄 것이 많은 어린 자식들이지만, 서로 거리를 두고 대하면 편하다.

옷을 고르는 것부터 심지어 아이의 알 수 없는 미래까지도 한발 뒤로 빼는 거다.

방향만 살짝 돌리면 맞을 퍼즐 조각을 '이거 안 맞아!'하고 내려놓아도 너무 감질나 하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여름에 핼러윈용 아이언맨 슈트를 매일같이 입혀달라 하면 입히자. 

무엇보다 내가 아무리 힘들고 속상해도 녀석들에게는 내 감정을 다 쏟아내지 않는 것이 원칙인 거다.

(이게 제일 힘들다.)

아이의 어떤 신변에 위협이 되지 않는 거라면 최대한 나의 오지랖을 자제하는 것.  


이적의 엄마로도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이 EBS 강의에 나온 적이 있었다.

사회자가 지금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 문장'을 부탁했다.

대답을 들은 백발 머리의 사회자가 다소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박혜란의 한 문장은,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세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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