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숑로제 Apr 26. 2016

우리집 판도라의 상자

2016. 4.26.



지리산 근처에서 좀비의 동태를 살피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을 가진 지리산. 울창한 수림과 풍부한 먹이가 있어서 야생동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2001년 국립공원관리단은 반달가슴곰을 28마리를  지리산에 방사했다. 반달곰 복원 사업의 교수 및 연구진들이 불철주야로 곰의 행적을 관찰하고 보고서에 제출할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특히 올 겨울 동면에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온도 및 환경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근처에 위치한 아영면 보건지소에서 한 남자 또한 바짝 긴장한 자세로 좀비의 동태를 숨죽이며 파악하고 있었다. 아영면 공중보건의였던 그는 연휴에 마땅한 약속도 없겠다 비디오 게임을 실컷 할 생각에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한창 낯선 지리산 산자락에서 어슬렁거리는 반달곰처럼 그의 아바타는 밤낮으로 쉴 새 없이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고 적을 물리쳤다. 마침내 끝판에 도달할 때 즈음 그는 예상치 못한 적들의 공격에 무너진다.

 "아....."

포효하는 한 마리의 반달곰처럼 그는 순도 높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탄식을 길고 깊게 내뱉는다. 그리고는 그는 곧 깨닫는다. 자신이 지난 3일 동안 방금 처음으로 말을 했다는 것을...





그가 다음 날 피곤한 건 당연하다


  신랑은 플레이스테이션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  필드에 나가 하루 종일 치는 골프보다는 낫다고 은근히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을 강조하는 심리는 뭔가 스스로도 떳떳하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비디오 게임 속의 아바타는 긴 머리를 대충 묶고 지저분한 나시티와 카고 바지를 입은 여자이다. 그녀는 왼손에 횃불을 들고 버려진 집이나 산길을 헤맨다. 늑대소리, 천둥소리, 총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린다. 틈틈이 영화 속에서 위기를 알리며 심장을 졸여오는 배경음악이 흘러 나오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어스름한 안개로 보이는 시야가 무척이나 어둡고 적막하다. 여자는 쉴 새 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데 아마도 뭔가 가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멧돼지 같은 것이 덮쳐서 몸싸움을 벌인다. 신랑은 몸을 더 화면 쪽으로 숙이고 조이스틱을 다급하고 집중적으로 누른다. 이윽고 다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이며 한숨을 쉰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몸을 앞으로 움츠린다.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다. 내가 이렇게 자세히 게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보통 내가 글을 쓸 때 그 틈을 타서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도 그렇기 때문이다.

  



나를 외롭게 만드는 우리집 판도라의 상자,
그 이름은 '플레이스테이션 4'


주말 내내 손님을 치렀다. 집안 꼴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미세먼지로 환기도 잘 못 시키니 물걸레로 닦아야겠다 싶었다. 닦을수록 물걸레에 묻어 나오는 소복한 먼지들을 보며 아이들한테 슬슬 미안해지고 있던 차였다. 티브이 옆에 까만 전자기기에서 시디 한 장이 튀어나왔다. 신랑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이다. 방금 내가 뭔가를 건드렸나 본데, (아마도 배출 버튼) 이 기계는 당최 버튼이 전혀 없고 죄다 터치 방식이다. 터치에 관련된 버튼도 정말 희미하게 안내되어있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거실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시디를 보고 모여들었다.

"이거 노래 나오는 거야? 보는 거야?"

"응? 몰라. 아빠 것이라서."

"나 보고 싶어"

"나도 할 줄 몰라. 아빠 오면 물어봐"  

대충 위기를 모면했다. 다행히 시디에는 아이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그림이 없었다.브이 다이 서랍은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데, 이 안에는 각종 게임 기기 및 시디를 보관하고 있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아이가 티브이 아래 굳게 잠겨있는 장식장을 여는 순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이다.(그러니까 우리 가정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무엇보다 신랑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내가 외로워진다. 신랑이 게임을 하는 것과 나의 외로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왜 나는 신랑이 게임하는 것에 못마땅한 것인가? 내가 특별히 게임에 대한 나쁜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깔끔하고 건전한 여가생활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밖에서 돈쓰고 돌아다니 것 보다야 낫다) 게다가 아이들도 곤히 자는 밤에 틈을 타서 한 시간 조금 넘게 한다.(게임시간을 줄이라는 말에 신랑은 지금도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 말고 나온 기분이라고 했다.)  결국 내가 지금 까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나 빼고 혼자 뭔가를 신나게 하고 있는 모습에 괜히 약이 오르는 것이라고 내렸다.

(실제로 홀딱 빠질 만한 책을 읽거나, 블로그를 쓴다던가 할 때는 별 상관 안 한다. 그래서 그는 요즘 나의 블로그 활동을 그토록 지지하는 것인가? 설마...)


풀옵션 게임 셋이 구비된 게임룸을 갖는 게 로망이라길래,

애들 대학 다 보내고 하나 쌔끈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여행길에 차 안에서 뭔들 안 들어주겠냐고)

그 약속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블로그에 오시면 제가 그동안 써온 글들도 보실 수 있어요.

평범한 아줌마의 소소한 일상의 기록일 뿐이지만,

그래서 당신의 공감을 기대해 봅니다.

  

http://blog.naver.com/wplustyle/.

작가의 이전글 'Made in 대구'의 가족들이 모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