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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un 18. 2021

김치 송송 비빔국수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철이면 자주 해 먹는 것이 만만한 국수 요리인데, 그중에서도 집에 맛있는 신김치만 있으면 뚝딱 한 그릇 만들어-후루룩 먹기도 편한 요리가 비빔국수이다. 면류는 다 좋아하는데 특히 소면을 이용해서 만드는 잔치국수와 비빔국수를 좋아한다. 날씨가 쌀쌀할 때 뜨거운 멸치 육수에 야채 고명을 얻은 잔치국수를 종종 해 먹었는데 사람이 간사한지라 좀 더워지니 매콤한 비빔면이 더 당긴다.

 조카가 요즘 부쩍 입맛이 없다. 내게 "이모, 뭐 맛있는 거 없어? " 하며 신메뉴를 떠올려 보라고 채근한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조카 덕에 부지런히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를 검색하다 보니 점점 할 줄 아는 메뉴가 많이 늘긴 했는데, 오늘은 난감하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갑자기 엄마가 요양원 가시기 전까지 여름철 입맛 없을 때면 종종 해주시던 비빔국수가 생각났다. 그 손맛을 흉내 내서 이쁜 조카한테 감칠맛 나는 국수 요리의 신세계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늘 저녁은 국수를 안 좋아하는 작은 녀석을 위해서는 제육볶음에 감자조림 그리고 큰 조카를 위해서는 소면으로 국수를 비벼줘야겠다.

 

  큰 조카가 급하다고 성화다. 5시까지 학원 보충이 있어 간단하게 이른 저녁을 먹고 가야 된다고 4시 40분엔 나간다 한다. 벽시계를 보니 3시 50분이다. 급히 달걀부터 삶기 시작한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오이가 있다. 신김치도 꺼내 오이는 채 썰고 김치는 송송 썰어 주방 한편에 두고 국수 삶을 물을 올려놓는다. 시간이 넉넉하면 더 맛있게 조카가 반할만한 깔난 국수를 완성할 텐데... 아쉬움은 뒤로하고 부지런히 바삐 손과 몸을 움직인다.



 참 한참 팔팔하던 젊은 시절엔 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했었는데-작열하는 눈부신 태양과 젊음의 열정이 느껴져 좋았다. 오죽했으면 아들의 아명도 '여름'이라고 짓고 태양같이 밝고, 빛나고,  건강하라고 열심히 아들의 이름을 불러댔다. 포동포동 젖살 오른 아들이 내가 부르는 소리에 아장아장 걸어와 내 품에 안기던 때가 떠오른다. 그 아이가 이제 청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활과 같이 빠른 게 실감이 난다.


 물이 끓는다. 소면을 부채처럼 쫙 펴서 끓는 물속에 넣고 젓가락으로 엉키지 않게 살살 저어준다. 몰이 끓어오를 때 찬물 한 컵을 부어 면을 탱탱하게 만든다. 국수가 투명하게 익었으면 찬물로 잘 헹구어 둔다. 자, 이제 국수를 본격적으로 비벼본다. 간장과 설탕 고추장, 참기름을 적당량 넣고 신김치랑 비빈다. 취향에 따라 양념을 조절하는데 난 1인분 기준으로 간장 1스푼, 고추장 1스푼, 설탕 반 스푼을 넣었다. 비벼진 국수를 면기에 담고 고명으로 채 썬 오이와 당근, 김가루, 깨소금, 삶은 달걀을 예쁘게 올려놓는다.



 조카가 면기에 담긴 국수의 비주얼에 우선 만족한 듯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비실비실 웃는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우선 눈으로는 합격이다. 아이의 입맛도 입맛인지라 합격점을 받았을까 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카가 한 입 먹기 기다렸다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 "응. 당근 맛있어! " 하고 깔깔 웃는다. 시간이 없어 오늘 나의 솜씨를 100% 다 발휘 못했다고 조카한테 깔깔 웃으며 말한다.

 조카들 식사 준비 아르바이트하다 보니 솜씨가 날로 일취월장한다. '이거 이 일로 쭉 나가야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조카가 내 웃음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조카가 금세 한 그릇 뚝딱 하더니 서둘러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선다. 이제 작은 녀석 저녁 찬을 준비하려 앞치마를 고쳐 멘다. 이제 마이너스의 손이 아니라 요리계의 미다스의 손이다!

 동생이 내일 대장내시경 검사로 멀건 미음만 들이키며 입맛만 다신다. 다음에 검사 끝나면 해주겠노라 웃으며 달랜다. 하교 후 깜박 잠이 든 조카를 깨워 저녁을 먹이고 뒷정리를 하니 벌써 7시가 다되어간다.


 집에 들어서니 어김없이 불 꺼진 둥지가 나를 반긴다. 다시 혼자이다. 이제는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여전히 낯설다. 엄마가 계실 때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 툴툴거렸는데 그 잔소리마저 그리운 날이다. 오늘따라 투박한 손으로 쓱쓱 양념장에 비벼 주시던 엄마표 국수가 먹고 싶다.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의 엄마의 뒷모습도 그립다. 내가 국수를 만들며 엄마를 추억하듯 오늘 국수 한 그릇에 담긴 사랑을 훗날 조카도 기억할까...



 돌아오는 주에 엄마 생신이 있다. 또 내 머리가 분주하다. 어떤 메뉴로 입맛 없으신 엄마의 미각을 살릴 수 있을지 목하 고민 중이다. 별도로 다음 주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해주면 좋아라 잘 먹을지 계속 머릿속으로 이 궁리 저 궁리 바쁘다. 내가 엄마의 손맛으로 우리가 공유한 삶의 일부를 추억하듯 조카나 아들도 나의 음식을 통해 나를 기억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그냥 이다음에 엄마나 이모를 떠올리면 그리운 맛. 한, 두 가지 있으면 좋겠다. 다시 또 다른 소원을 가슴에 꾹꾹 눌러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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