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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Aug 05. 2021

죽음을 대하는 나의 자세.

 새벽 3시가 조금 안되어 깼다. 숙면을 못 취한 탓에 머리는 깨질 듯 아프다. 열대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여러 날 되었다. 잠시 브런치 나우에 올라온 최신 글을 살펴본다. 나와 같이 이 시간에 깨어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마음에 위로를 얻는다. 함께 있지는 않지만 어딘가에서 나와 같이 새벽을 맞이하고 있을 그들이 있어 이 밤 외롭지 않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아들을 배웅한다. 자꾸만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내기를 기도했다. 널브러 아들의 옷가지를 정리하고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피곤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어젯밤 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평소 느꼈던 소신대로 아들에게 만약 내가 아프거나 사고가 나서 위중한 상태에 이르면 연명치료는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혹시 내가 의식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일러두는 말이었는데 아들은 이런 이야기를 지금 왜 꺼내냐고 따져 묻고는,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꾹 닫고는 잠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아이의 과민반응에 나도 순간 당황했지만 아들의 서운한 마음도 알 것 같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막연히 두렵고 공포스러운 죽음에서 구체적이고, 당연히 거쳐가는 과정으로의 죽음으로 인식한 것은 작년 가을 무렵-이노우에 가즈코란 작가가 쓴 "50부터는 물건은 뺄셈 마음은 덧셈이란-책을 보고부터이다. 그녀는 책에서 50세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설정하고 노년기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제시하고 있다. 물욕 즉 욕망을 줄이면서 반대로 마음은 풍성히 채워나가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을 수 있기를 조언하고 있다. 흔적이란 남은 자들에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보다 보니 이제는(50세 이후는) 잘 사는 것보다는 잘 죽는 것에 대해서도 고심할 때라고 나름 결론을 냈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은 나에게 더 이상 죽음은-부정적인 금기어가 아닌- 삶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삶을 계획하듯 죽음도 계획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뒷모습으로 남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


 

 이혼 전에도 아들과 나는 대부분이 시간을 둘만 보냈다. 별거와 합가를 반복했기 때문에 둘만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아들은 아빠보다는 내게 더 속내를 털어놓고 허물없이 굴었다. 요즘 가끔씩 내가 만약 사고사로 갑자기 죽는다면 아들이 얼마나 허망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짐을 많이 정리하고 있다. 남은 자, 아들에게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나 감정 소모조차 시키고 싶지 않은 게 엄마 마음이다.  

 

 미뤄뒀던 몇 권의 앨범은 아들 것만 남긴 채 사진 20장 내외로 추려 아들에게 남겨 준 것도 몇 달 전 일이다. 그때도 아들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받았는데, 어제 연명치료 이야기는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나 보다. 하긴 아들의 입장에서는 엄마도 죽을 수도, 자기 곁을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보기에는 내가 아직 50대밖에는 안되었으니 감이 안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죽음은 예기치 못한 손님처럼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며- 남겨진 자들의 황망한 슬픔을 지켜보니 내 욕심은-   사랑하는 아들에게도 이별의 연습을 이제는 시켜야 된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마흔둘에 암으로 수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처음 나에게도-죽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깨달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삶이 더 내편에 가깝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언제나 삶에 머물 수는 없는 법. 나를 위해서도, 남겨질 아들을 위해서도 변화가 필요했다.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잘 살고 싶다. 인생 후반기를 잘 살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맘으로 잘 늙고 싶다. 아름다운 노년과 아름다운 죽음은 동의어의 의미가 아닐까. 마지막까지 내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면서 살고 싶다. 그것은 결코 생명에 대한 경시는 아니다. 나 역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다. 지금 아들의  마음이 당황스럽고 조금 섭섭하더라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시키고 싶다. 엄마의 죽음을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내가 언제고 죽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삶보다 죽음에 가깝다는 사실을 마주 대하니 삶이 더 절실해지고 가볍지 않다. 물욕은 내려놓게 되고 정신은 헛된 것에 메이지 않고 자유할 수 있었다. 그동안 헛된 것들에 좌절하고 마음의 요동치던 것에서 빠져나와 새롭게 겸손을 배운다. 나의 지인은 주기적으로 유서를 써 놓는다고 한다. 당연히 죽음 이후의 남겨질 자들에 대한 배려이겠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도권을 갖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나는 잘 죽고 싶다. 그리고 잘 살고 싶다. 연명치료의 거부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의 나의 소신일 뿐. 그렇다고 삶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죽음의 기준을 내가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다. 아들의 마음을 안다. 자식 입장에서는 무의미한 생존이라도 부모를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절절한 마음을... 나도 되도록이면 사랑하는 사람 곁에 오래 남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는 이별의 순간도 적절하고 아름다운 시간의 때가 있다. 나는 그 시간을 단지 선택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 내가 너무 아들에게 이기적인 것일까?...


 아픈 머리로 고심하는 이 아침 아직은 내 생각이 당분간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고 싶다. 매 순간 마지막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2021년 8월 5일 아침 단상.


      (사진출처-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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