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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Sep 07. 2021

하루치의 소중한 행복.

 동생이 2학기 복직으로 직장에 복귀하면서 내가 동생네 주 2회 가던 일을 주 3회로 늘려 가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동생과 조카들의 저녁을 책임지는 일이다. 음식이야 손은 느리지만 제법 맛을 내는 편이라 크게 어려울 것은 없지만-항상 고민인 것은 메뉴의 선택이다. 아이들 입맛에 맞으면서도 건강한 맛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중복되지 않으면서 다양한 맛을 보여주는 것이 나의 할 일이자 숙제이다.


  이번 주 메뉴는 고심 끝에 캘리포니아 롤과 스팸 마요 덮밥 그리고 비빔국수이다. 큰 조카가 특별히 먹고 싶다고 메뉴를 콕 집어 말해준 덕에 이번 주는 메뉴 고민을 덜었다. 스팸 마요 덮밥은 처음 해보는 것이라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해 나의 카톡방에  저장해 두었다. 


 

 화창한 날씨이다. 간간히 부는 서늘한 바람과 햇빛은 충분히 부드러웠고, 하늘은 물처럼 투명한 푸른빛이었다. 빨래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이른 아침 여름 이불을 빨아 널고 책 한 권을 가방에 넣어 명희 씨 카페로 갔다. 나뭇잎들이 어느새 짙은 초록에서 드문드문 갈색 잎으로 변해가는 가을이 다가왔다. 한결 달라진 아침 공기와 코끝을 맴도는 새로운 계절의 향기에 발걸음이 덩달아 가벼워진다.

 "안녕? 명희 씨~ 따뜻한 아메리카노 주세요~"하고 창가 테이블로 걸어간다. 여름 내내 아이스커피를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찾는 걸 보면 올해의 길고 뜨거운 여름은 지나갔다. 명희 씨가 건네준 진한 커피 향의 아메리카노를 마주 대하고 있으니 어느새 가슴속에 몽글몽글한 행복이 피어오른다.

 

 가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독일 작가의-파트리크 쥐스킨트-'좀머 씨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된 책이지만 보드랍고 순수한 유년시절의 그리움을 엿보고 싶은 날. 혹은 마음껏 행복해지고 싶은 날에는 나는 이 책을 읽는다. 마치 신선한 공기를 만나면 그것을 힘껏 들이마시고 싶듯이 이 책은 고운 회화 한 점을 보듯 아름답고, 순수하고,  선하다. 소설보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책. 오늘은 마음껏 행복해지고 싶은 날이다. 


 

 조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으로 에그타르트를 샀다. 벌써부터 방긋 웃으며 좋아할 녀석들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날씨가 좋아 산책 겸 운동도 할 겸 세 정거장 전에 미리 내렸다. 길을 따라 결 고운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니 이제 완연한 가을임이 느껴진다. 말갛고 투명한 대기 속으로 빨려 들 듯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집안을 들어서니 어지러 히 널려 있는 물건들이 아침에 정신없이 출근과 등교를 했을 동생과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해 짠했다. 식탁 위에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릇들이 널려 있다. 개수대에 그릇을 옮기고 대충 살림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다 보니 조카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귀가했다. 이모하고 반기는 아이들의 나를 부르는 소리가 반갑고 달콤하다.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 이모라는 소리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미리 준비한 에그 타르트와 우유를 아이들에게 내민다.

 오늘 아이들에게 줄 저녁 메뉴는 캘리포니아 롤이다. 갖은 야채와 달걀지단, 햄과 아보카도를 가지런히 썰어 접시에 담고 김과 고추냉이가 든 간장을 준비했다. 정성껏 한 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부르니 마침 동생이 퇴근하고 들어온다.


 

 동생과 아이들이 차려진 음식을 보며 환호한다. 각자 개인접시를 주고 입맛대로 롤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뭔가 놀잇감이 주어진 듯 재미있게, 유쾌하게 웃으며 식탁을 풍성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바라보니 그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 지긋이 동생과 조카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자취하는 아들과 요양원에 계신 엄마가 떠올라 잠시 코끝이 찡했지만 조카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이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어느새 해는 지고 도시의 불빛이 별 대신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아침에 빨아 널은 여름 이불을 잘 개어 옷장에 넣고 새로 춘추용 차렵이불을 꺼내 침구를 정리했다. 적당히 기분 좋은 피로함이 몰려온다. 포근하고 뽀송뽀송한 이불속으로 파고들며 평온하고 행복해서 꿈같은 하루를 돌아본다.

 쾌청한 날씨와 둥지 같은 나의 아지트가 있어 행복했고, 맘에 쏙 드는 책이 벗이 되어 줘서 행복했고, 정성껏 차린 음식을 알아주고 맛있게 먹어 주는 조카들이 있어 고맙고도 행복했다.  이만큼만 누리고 살고 싶다.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 가장 가치 있다는 것을 짧지 않은 삶을 돌아보니 이제야 알겠다.

 내일도 더도 덜도 말고 딱 오늘만큼의 행복이 주어지기 바라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는다.


        (이미지 출처-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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