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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Nov 03. 2021

오늘의 고백.


 어젯밤 내린 비로 도로 위에 수북이 낙엽이 쌓였다. 시야를 두는 곳마다 고운 단풍 진 나무들이 오묘한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사방으로 펼쳐진 절정의 가을 풍경이 고요한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길을 걷는다. 부는 바람에 울긋불긋한 잎들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메마르고 황량한 겨울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꽃을 피운다.

 

 한 달 전 테스트 삼아 처방받은 골다공증 치료제에 다행히 별다른 부작용이 보이지 않았다. 장기로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고,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약이라 아침 일찍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깊어 가는 가을에 가슴으로 시린 바람 한점 불어온다. 매년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계절을 타는 내가 올해도 어김없이 괜스레 센티해진다.

 

 말수 없는 동네 내과의 선생님이 3개월치 치료제를 처방해 주었다. 반세기를 넘게 살아온 몸이 이제 이곳저곳 손봐 달라고 아우성을 치니 씁쓸하다. 이제는 몸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살 몸을 달래며 살 때가 된 것 같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쯤 고장 나기 시작하는 몸의 상태를 알았으니-주의하고 노력하면 노화의 속도를 완만하고 천천히-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렀을까. 어느새 수줍음  많고 꿈 많은 소녀에서 노년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다. 지난 시간이 꿈결같이 지나갔다. 회한이 남을 만큼 서툴고 힘들게 시간을 보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나간 청춘의 시절을 살았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현재의 내가 더 좋다. 가진 것도, 젊음도 없지만 대신해 지혜와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생겼으니 흐르는 세월이 야속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공평하다. 잃는 게 있으면 새로 얻는 것도 있다. 경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훌륭한 자산으로 남는다. 지나고 보니 고통과 실패가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나와 약국에 들러 골다공증 치료제를 구입하고 빠른 걸음으로 내가 사는 동네를 기점으로 크게 한 블록을 돌고 나니 30분이 걸렸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서늘한 공기에 맑은 대기가 상쾌하다. 아침을 거른 탓에 허기가 져 근처 국밥집에 들어섰다. 정오가 채 안되었는데 테이블이 거의 꽉 찬 걸로 보아 맛집인 모양이다. 국밥 한 그릇을 주문하고 창 밖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구시가지의 풍경이 포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신도시에 20년을 넘게 살다가 처음 친정으로 왔을 때는 오래되고 낡은 이 동네가 마치 내 신세 같아 못 견디게 싫었는데 이제는 몸에 잘 맞는 외투를 걸친 듯 편안하고 좋다. 마음을 여는데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사람이던 장소던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더디고 느리게 가는 나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부족함마저 사랑한다.


  따끈한 국밥에 잘 익은 깍두기를 곁들인 점심을 먹고 오분 거리의 명희 씨 카페로 천천히 걷는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어제와는 또 다른 아름다운 가을빛이 눈이 부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11월의 가을날. 올해가 아니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눈에, 가슴에 새겨 놓는다.



  명희 씨 카페 앞에 곱게 물든 단풍들을 간직하고 싶어 사진 한컷을 찍어 갤러리에 저장했다. 순간의 아름다움이지만 내년을 기억하며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친구에게 안부 인사말과 함께 사진을 전송해줬다.

 명희 씨가 따뜻한 커피와 브라우니를 내 앞에 놓아준다. 익숙한 향기와 창밖의 풍경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죽을 것 같았던 어제의 과거도 참고 견디다 보니 오늘의 평안함이 있다. 외적 상황과 환경은 어찌 보면 더 악화되었지만 어제의 운명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내가 아니다. 세월이, 시련이, 고난이 나의 스승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연민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보다는 오늘의 내가 오늘보다는 내일의 내가 반짝이며 빛이 날 것이다. 소소한 감사를 누리는 일상의 회복이 어떤 귀한 것보다 축복이었음을 고백하며 오늘 저 황홀한 가을을 마주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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