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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Feb 09. 2022

봄을 기다리는 마음.


 별다른 계획 없이 새해를 시작한 지 벌써 2월 중순이다.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올해 안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완서 작가의 전집을 읽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거기에는 오래전 읽었던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젊었을 때 그녀의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오십 중반인 내 나이에 느끼는 감동과 비교하며 읽고 싶었다. 첫 권으로 이십 대에 만난 그녀의 데뷔작 '나목'을 골랐다.

 

 코끝이 쨍한 매콤한 추위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다. 머플러까지 목에 칭칭 동여매고 조카들이 있는 동생네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분명 바쁘게 출근한 동생이 애들을 깨우지 못하고 나갔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아침도 거르고 늦잠을 자고 있을 아이들을 깨워 이른 점심을 먹이려 마음이 급하다.

 햇살이 눈부신 정류장에 서있으니 그나마 추위가 견딜만하다. 아니 햇살은 어느새 봄볕을 담고 있다. 절기 입춘이 지났으니 기다리던 봄은 곧 올 것이다. 동토를 녹이는 따뜻한 햇살이 추위에 떨던 나를 감싸 안는다. 그 품에 안겨 곧 다가 올 생명의 계절을 꿈꾼다.


 

 작은 조카의 이름을 큰 목소리로 부르며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기지개를 켜는 녀석의 뺨에 입맞춤한다. 새해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소년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반긴다. 큰 조카의 방  앞에서 노크를 하니 기척이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2  여학생도 한밤중이다. 엉덩이를 닥여 깨우고 부지런히 점심 준비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추운 겨울날에 제격인 김치찌개다. 신김치에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넣고 김치가 무를 정도로 끓여내 마무리로 대파와 두부를 넣고 살짝 끓여주면 밥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는 쉬운 별미이다. 돼지고기는 너무 퍽퍽하지 않도록 앞다리살 대신 목삼겹으로 고르고 백종원식 레시피대로 고기 육수를 내어 김치를 끓여내니 손쉽고 깊은 맛이 난다.


 아이들과 김치찌개로 이른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햇빛이 길게 들어오는 식탁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안았다. 가방에서 어제 읽다만 '나목'의 뒷부분을 펼쳐 읽는다.



 6.25 전쟁이 남긴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주인공이 중년에 다시 본 나목의 그림은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봄을 품고 있는 희망의 상징이었음을-나 역시 깊이 공감하며 책을 덮었다. 애절한 사랑에 가슴 떨렸던 작품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절규와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지금 내게도 이 계절 거리의 나목들은 헐벗고 앙상한 죽은 나무가 아닌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생명의 근원이자 희망으로 보이니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지만은 않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사물의 중심을 꿰뚫어 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된 것. 이것은 연륜이 주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남서향인 거실이 오후엔 빛으로 가득 찬다. 충만한 빛의 향연에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의 긴 락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나는 이십 대의 소녀 같은 설렘으로 창가에 서있다.



  조카의 부르는 소리에 봄꽃 같은 청춘의 계절에서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아이들을 향해 웃는다. 유한한 생명을 살 수밖에 없지만-결국은 무수한 잎을 떨구고 나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나는 흙으로 돌아가고 아이들은 그 자양분으로 싹을 틔우고 꽃으로 탄생할 것이다. 이 만고불변의 진리가 오늘따라 아름답게 느껴진다.


  앞으로 몇 번의 겨울을 지나 몇 번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있는 건 나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 항상 고대하는 봄이 내게 주어질지 모르지만 언제나 간절히 올 해가 마지막인 듯 사랑할 것이다. 기다릴 것이다. 눈을 감는다. 찬란한 빛의 축제와 꽃들의 환호성을 그리고 연둣빛 잎들의 군무하는 나의 계절, 봄이여! 나는 겨울 속에서도 너를 느끼며 그리워하며 사랑했노라고 고백한다. 매번 첫사랑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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