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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Feb 26. 2022

겨울의 끝자락에 강가에서.


 30년 만에 재회한 영주와의 만남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월 중순의 첫 만남 후 무심한 나와 달리 살뜰하게 챙기는 영주 덕에 두, 세 차례 만남을 갖었다. 집 밖을 잘 안 나가는 나이지만 그녀의 푸근함과 적극적인 구애(?)에 오늘도 오후에 식사 약속을 잡았다. 오늘은 초등학교 동창이자 대학동창인 지영까지 모처럼 합류하기로 했으니, 세 여인이 만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눈꺼풀도 중력의 법칙을 따라 점점 쳐지는 것이 씁쓸하다. 젊었을 때는 쌍꺼풀이 비교적 또렷했는데 이제는 속쌍꺼풀처럼 눈매가 작아졌다. 화장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워낙 손재주가 없어-그리기를 못하는 탓에-나의 화장법은 맨 얼굴에 립스틱이 전부였는데, 친구들이 곱게 화장한 모습이 보기 좋아 나도 한 번 해 볼 요량으로 아이라이너를 구입했다.



 긴장한 손이 덜덜 떨린다. 또렷한 눈매를 위해 초콜릿색 아이라이너로 눈매를 따라 그리는데 첫 솜씨라 영 이상하다. 생기 있고 또렷한 눈매이긴 한데 뭔가 좀 어색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아 10분도 안 되어서 지워버리고 다시 립스틱만 발랐다. 가까운 서울 근교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우선 영주가 하는 퀼트 공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5호선 강동역에서 마천행 방향인 지하철을 갈아타고 방이역에서 하차했다. 영주의 수업이 없는 날 퀼트 공방은-어느새 우리의 사랑방이 되었다. 


 퀼트 공방을 운영하는 틈틈이 시니어 모델 수업을 받는 영주는 오늘 오전 모델 수업을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가게로 들어서니 반갑게 맞이한다. 그녀의 결혼생활도 나처럼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편과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황을 지혜롭게 풀어가고 있으니,  그것이 이혼한 나와의 차이점이다. 누구의 삶이, 선택이-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나는 비록 이혼을 선택했지만 난 그녀의 선택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삶은 그 사람이 돼 보지 못하면 속속들이 알 수가 없다. 그냥 나는 그녀를 믿고 존중하고 그녀의 삶을 응원할 뿐이다. 그녀가 나의 삶을 존중하고 응원하듯 서로 다름을 우린 인정하고 있었다.



 낚시터가 보이는 강가엔 서늘한 바람 한 점이 지나간다. 아직 채 얼음이 얼어 있는 강기슭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사람 없는 빈 낚시터엔 아직 겨울이 길게 드리우고 있다. 메마른 나목들을 본다. 저 안에 꿈틀대는 푸른 생명. 곧 아오를 빛과 생명의 잔치가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강가에 세 여인이 서서 오늘의 기쁨과 내일의 희망을 눈빛으로 나눈다.


 붉은 해가 저무는 개와 늑대의 시간. 그 어스름 속에 내가 서있다. 안개 같은 삶과 닮아있지만 길에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모호했던 길의 윤곽은 선명해진다. 감사하고 도전하는 삶의 끝에서 무엇을 만날지는 모르지만 두려움보다는 설렘으로 내게 주어진 길을 가고 싶다.

 오늘의 소풍에 동반자가 되어 준 친구들과 겨울이 지나가는 이 황량한 벌판에서-오늘이 우리에게 가장 멋지고 젊은 날임을-새롭게 시작하는 인생 2막을 서로 축복하고 격려하며 잘 살 것을 다짐했다.


 

 친구들과 오늘의 나들이 길에 헤어지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포옹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불 꺼진 둥지로 돌아와 나를 반기는 꼬마 화분에 물을 주었다. 초록의 작은 생명력이 내 마음을 포근하게 감싼다.

 거울을 본다. 화장기 없고 수수하지만, 온화한 모습의 여인이 웃고 있다. 나의 살아온 궤적이 고스란히 내 얼굴에 남아있다. 아픔도 기쁨도 모두 한데 뒤섞여 조금씩 단단하게 여물어 가는 나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그렇게 익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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