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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Dec 30. 2020

또 다른 날들의 시작.

  휴일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며칠만 지나면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해가 시작된다. 연초의 기대와 설렘이 이제 아쉬움과 후회로 바뀌어 곧 시간의 뒤편으로 사라져 간다. 흐르는 시간 앞에선 누구나가 공평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올 한 해 열심히 산다고 애썼는데도 연말이 돼서 돌아보니 참 미진하고 부족한 게 많다.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내심으로는 우울증 치료약을 끊는 것과 생활에 꼭 필요한 것만 소비하는 소박한 삶의 추구와 또 쉽게 상황에 흔들리는 내 마음의 중심잡기였다.

 약은 용량을 반으로 줄였으니 반쯤은 계획을 성공했다고 믿고 싶고, 소박한 삶의 추구는  1년 동안 생필품 외의 것에는 거의 지출을 하지 않았고- 안 쓰고 쓸만한 물건들을 정리해서-부피를 줄였으니 성공했다.   그런데 세 가지 계획 중 나를 항상 힘들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 환경ㆍ상황에 쉽게 휘둘리고 평정심을 잃는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세우는 일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너무 어려운 숙제를 나한테 요구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수양이 부족한 탓인지...




 잔뜩 흐려있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세밑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하더니 이 눈이 그치면 추워질 것이다. 점점 바람이 거세진다. 한기가 느껴져 창문을 닫았다.

 한해 끄트머리라 그런지 괜히 센티해져서 오전부터 평소 소원했던 친구들에게도 메시지와 안부 전화를 거느라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모든 것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도 올해는 유독 못 견디게 허전한 것은 숙제를 마치지 못한 까닭만은 아니다. '이뤄놓은 것 없이 또 한 해를 보내고 또 나이만 먹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초조함으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이어리를 펼쳐본다. 2020년 한 해, 나의 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날짜별로 간략하게나마 그날의 일정과 나의 감정 상태를 적어 놓았다. 그리고 나에게 특별한 날에는 별표로 그날이 스페셜한 날임을 표시해두었다.

 천천히 앞장부터 넘겨본다. 다이어리 서두에 새해 소망, 계획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당부한 문장이 눈에 띈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가두지 않기.'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 연초가 아니라 매일매일 다짐하지만 나한테는 참 어려운 일이다

 다이어리를 넘길 때마다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상황은 희미해도 그때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음 올 한 해 이런 무수한 일들이 나의 삶을 한 올 한 올 수놓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나의 삶을 엿볼수록- 나의 자책이 지나친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기대만큼은 아닐지라도 불운에 고개를 떨구고 의기소침하던 나의 존재는 다행히도 그곳에 없었다.

 



 갑자기 며칠 전에 읽은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가 떠올랐다. 쥐스킨트는 내가 좋아하는 독일이 나은 세계적인 유명 작가이다. 십 년 전쯤에 읽은 작품을 우연한 기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자신의 예술에   깊이가 없다는 말을 듣고 고뇌하다 죽음을 선택하는 예술가와, 그녀의 작품에 깊이가 없다는 논평으로 본의 아니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평론가 두 사람이 이야기이다. 그녀가 죽자 그는 태도를 180도 뒤집어 그녀의 작품에서 '깊이에의 강요'를 느낄 수 있다고 글을 쓴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누구나 암암리에 혹은 은연중 깊이를 강요받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이 질문을 이 작품을 읽고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젊었을 때는 사실 잘 모르면서도 깊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옆구리에 철학책을 끼고 다녔고    주류보다는 아웃사이더처럼 행동하기 좋아했다.

 남들과 다른-깊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길 스스로 원했다.

 되돌아보면 설익은 깊이- 스스로에게 깊이를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오래전 일이다. 스스로 깊이를 강요하고 스스로가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낀 것은...

  오히려 세월이, 나를 에워싼 환경이 할퀴고 간 상처에 몸에 힘을 너무 뺐다.

 그런데 최근 2년 동안 몸과 마음의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에 고무되어서 너무 큰 목표치-깊이에의 강요-를 설정했나 보다.

 연초 계획한 세 가지 것 중에 상황, 환경에 쉽게 휘둘리는 나의 내면을 바로 세우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정말 실패한 것은 아니다. 내가 욕심이 너무 컸고 너무 급하게 많은 것을 바꾸려 했다.

 지금처럼 매일매일 조금씩 잊지 않고 노력한다면 진짜 깊이 있고 단단한 사람이 될 거라 믿는다.


 

 다이어리를 덮었다. 한해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상황은 나아진 것이 없는데 이렇게 무사히 한해를 마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나의 어깨를 두드린다.'수고했다~~'

 어느새 거친 파도 같은 내 마음이 잔잔한 물결로 바뀌었다.

 하루가 저문다. 시간은 흐르고 어김없이 내일의 태양은 뜬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시간은 흐르고 수많은 다른 날들이 시작되고 나는 오늘처럼 그 길을 묵묵히 걷는다. 그 길이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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