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9시이다. 얼마만의 단잠인지 모르겠다. 늘 밤이면 깊은 잠을 못 자고 여러 차례 깨곤 했는데 어젯밤은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내리 잤다
이렇게 단잠을 자는 날은 한 달에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어젯밤 숙면을 취한 것도 그저께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 덕이다.
이래저래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길은 서글프고 험난한(?)것 같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 것 같은데... 오늘 처음 '몸과 마음이 같이 늙어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초로의 중년 여성인 친구들과의 통화 내용의 반이상은 하나, 둘 고장 나기 시작하는 몸에 대한 하소연과 중년에서 노년-갱년기-으로 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복합된 감정을 나누는 것으로 채워진다.
나 역시 몇 년 전부터 잦은 통증에 시달리고 마음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면서 갱년기의 중심부를 통과하고 있는데 난 그냥 아줌마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닌 참 어정쩡한 이 시기가 불편하다.
아침부터 자리에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멍 때리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11시가 조금 넘었다. 브런치로 샌드위치를 하려 보니 결정적으로 식빵이 없다.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하려고 집에 있는 재료를 살펴보니 변변한 재료가 없다. 달걀, 햄 , 김, 양파.
'무얼 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싱글인 나는 정작 나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려먹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자꾸 요즘 컨디션이 난조를 보이는 게 내가 섭취하는 음식의 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만은 나를 위해 정성껏 요리해서 맛있게 먹고 싶었다.
'맞다! 신김치가 있으니 오랜만에 입맛 돌게 김치볶음밥 해 먹을까?'
김치볶음밥을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맛있게 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아들과 조카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김치볶음밥-별5개중4개반쯤.
오늘의 미식가들은 없지만 나는 오늘 나만을 위해 정성껏 만들고 싶었다.
먼저 도마에 햄을 곱게 썰어 놓고 양파와 당근을 곱게 다진다.. 김치가 주가 되므로 김치양의 삼분의 1 정도 다져놓고 김치는 송송, 적당한 크기로 썰어 신김치 국물과 같이 준비해 놓는다.
팬을 중불로 달구고 기름을 넉넉히 두른 후 야채를 넣어 먼저 볶다 햄과 김치를 넣고 볶는다. 이때 김치가 많이 시었을 경우엔 설탕 한 티스푼 정도 넣어 신맛을 희석시킨다. 야채, 김치가 기의 볶아지면 김치 국물과 고춧가루를 넣고 조금 더 볶다가 졸여준다.
중요한 Tip하나. 간장 한 스푼 정도 불에 달궈 섞어주면 불맛이 느껴지는 깊은 맛이 난다.
이제 다된 양념에 찬밥(오늘의 포인트!)을 넣고 저어준다. 불 약하게 조절. 마지막으로 기호에 따라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뿌리고 깨소금을 뿌려주고 근사한 접시에 담는 걸로 완성한다. 계란 프라이도 기호에 따라 선택~~
난 미식가는 아니지만 눈으로 즐기고 눈으로 먹는 걸 좋아한다. 음식을 한 목적은 벌써 잊었다. 멋지게 플레이팅 할 접시를 한참 찾았다. 접시에 고슬고슬한 볶음밥을 담고 계란 프라이를 중앙에 올려놓았다.
짜짠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탁자로 가져간다. 잠깐 식사 전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했다.
잠깐 내가 해준 김치볶음밥을 좋아하는 조카와 아들이 떠올랐지만 오늘은 기억에서 밀어냈다. 오늘은 순전히 나를 위한 밥상이었다.
콩나물국이나 어묵탕이 있었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한 잎 떠서 먹었다. 찬밥으로 볶은덕에 밥알이 고슬고슬하니 야채랑 김치랑 씹히는 맛이 -적당히 시면서 칼칼하고 들기름 특유의 깔끔한 고소한 맛-입에 환상적으로 퍼진다. 중간중간 프라이랑 먹어주면 담백한 맛은 배가 된다.
오랜만에 나를 위한 요리는 대성공이다. 건강에 자신의 없으면서도 건강을 위해 내가 실천하는 것은 고작 몸에 안 좋은 거 안 먹기 정도- 인스턴트 음식, 탄산음료, 튀김 음식, 술...
싱글 생활 초기에는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금은 거의 연명 수준이니 오늘로써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 나를 위해 음식을 장만해 보았다.
내 나이쯤 달려오면 사랑을 받을 일보다는 베풀 일이 많은 게 사실이다. 보통의 경우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충분히 받은 사랑을 토대로 중년기, 노년기에는 사랑을 아래로 옆으로 또는 위로도 베풀 줄 아는 게 건강하게 잘 늙어가고 있다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중간중간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먼저 나를 사랑하고 챙기는 일이다.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어서 엄마의 손길을 덜 타고 엄마의 조언을 꼰대의 소리로 치부해 버릴 때가 종종 있고 남편들도 마찬가지로 같이 갱년기를 겪으니 서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나야 어떠면에선 다행히 남편과의 갈등은 없지만... 대신 부부가 함께 사는 삶보다는 노년기의 고독함ㆍ외로움에 더 노출될 가능성은 훨씬 크다. 사실 벌써부터 슬프게도 짐작이 된다.
새해라고 세웠던 계획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점검을 해봤다. 독서계획은 아직 만족도 백 퍼센트.
끼니 거르지 않기는 여전히 빨간불, 글쓰기도 글감 때문에 늘 고민하면서도 아직 쓸 수 있으니 다행.
식사를 잘 챙기는 것은 건강을 지키고 더 나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 시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이겠지? 그런데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 이타적 사랑을 하는 것은 힘들다. 쉽게 지친다. 내가 충분히 사랑으로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 나를 위한 레시피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갱년기는물결의 파고도 크고 마음의 부침도 심한 누구나 노년기로 향하는 통과의례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다 그러하듯 잃는 것만 있지는 않다. 연륜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과 여유를 믿어보기로 했다.
전에 노년을 떠올리고 가장 싫었던 것은 감성의 탄성이 떨어져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잃고 불통의 사람이 될까 봐 하는 걱정이었다.
마음만은 꼰대가 아니고 싶은데 자기가 보고자 하는 부분만 보는 편협한 사람이 될까 가장 두렵다.
그럴 때마다 고슬고슬한 밥에 여유와 사랑과 배려를 넣고 양념으로는 느긋함과 포용의 마음을 넣어 볶음밥을 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