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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쁜손 Jan 12. 2021

또르르 행복이 내게 오는 소리.

 한파에 며칠 동안 할 일을 미뤄두고 두문불출하다 보니 더 기분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 밀린 일도 할 겸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집에서 나오기 전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 나오는 게 나의 요즘의 습관이다. 정작 중요한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무언가 집에 한, 두 가지 놓고 나와 낭패를 본 적이 최근 부쩍 잦다. 그럴 나이가 된 것인지... 기는 나름 자신 있었는데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서글퍼진다.

 우체국에 가져갈 작은 짐꾸러미와 장바구니, 엄마 일로 건강보험공단에 부칠 서류 세 가지-모두 다 챙겼는지 길을 나선 중간에도 다시 확인했다.

 우리 동네 우체국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애매한 도보길이라 거의 세정거장을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피해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 서니 사람들로 붐빈다. 빨리 대기 번호표를 뽑고 박스에 절친인 대전에 사는 여고 동창생에게 보낼 도서와 손편지를 담아 정성껏 포장했다. 가끔 내게 메일이나 커피 쿠폰으로 안부를 묻는 친구인데, 친구의 생일이 코 앞이라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찾다가 좀 고전적인 스타일이지만 그녀가 좋아할 만한 시집과 내 마음을 담은 손편지를 준비했다.



 예전에 흔한 게 문구점이었는데... 요즘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다행히 우체국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어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들어갔다. '어머나, 세상에 세월이 참 많이 흘렀는데도 내 학창 시절 때의 문구점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게 없네.'

 다르다면 문구점 입구에 걸려있는 빨간색 돼지 저금통들이 지금은 형형색색의 돼지 저금통까지 다양하게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역시나 좁은 통로들 사이로 빽빽하게 물건들이 채워져서 아이들을 유혹한다. 나는 어릴 적 지금은 흔하디 흔한 샤프펜슬이나 36 컬러(?) 사인펜 또는 색연필을 갖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가 돼버렸다.

 새해에 필사까지는 아니어도 그때그때 생각나는 글감이나 좋은 글귀를 적어 놓을 노트 두 권과 펜 몇 자루를 고르고 문구점을 빠져나왔다.

 '이 혹한을 무릅쓰고 나왔으니 동선은 짧게, 볼 일은 효율적으로 보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내가 지금 위치한 문구점 근처엔 재래시장과 내가 단골로 가는 미용실이 있는데 마침 머리를 자를 시기고 바로 코앞이라 장 보기 전 머리를 다듬고 싶었다.

 

 미용실 안이 텅 비어 있어 기다리지 않고 머리를 자를 수 있었지만 불황의 여파가 동네 미용실까지 미친다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아까와는 다르게 단정하고 깔끔한 게 며칠 집안에서 쳐져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미용실에서 재래시장까지 거리는 5분이 채 안 걸린다. 우체국, 문구점, 미용실, 재래시장이 다 근거리에 붙어 있어 오늘은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려고 집을 나서기 전부터 마음을 먹었다.

 엄마가 요양원 들어가시기 전 가보고 처음 가는 것이니 2년 만에 가 보는 것이다. 집에서 거리도 멀기도 하고 재래시장에서 파는 단위는 1인 식구 위주보다는 푸짐한 양을 파니 가격을 떠나 필요 이상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소포장 단위를 파는 동네 마트나 온라인 마켓을 이용한다.

 오늘은 그냥 장을 보는 목적보다는 그냥 어릴 적, 아니 요양원 입소 전 엄마랑 들렀던 시장 구경이 불현듯 하고 싶었다.



 우리 동의 시장은 구시가지에 속한 정비가 안된- 좁고 규모가 작은 동네 시장이다. 내가 2013년에 친정에 들어와 산 후 엄마 따라 가본 것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히지만 갈 때마다 느낀 것은 그 사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에는 시큰둥한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러-추억하러-북극한파를 뚫고 나왔으니 대견스럽다.

 좁은 시장길 양쪽에 과일, 채소 좌판이 들어서 있다. 얼마나 추웠는지 시장 입구 드럼통 안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상인들이 삼삼오오 불을 쬐고 있었다.

 토마토 한 바구니에 5000원, 딸기 한팩 7000원 마트의 반값이다. 마스크 넘어 할머니의 깊게 폐인 주름이 보인다. "싸주세요~" 마스크 위로 할머니의 고단한 웃음이 엿보인다.."많이 파세요!"

 시장 구경이 목표였는데, 내가 지금 많이 시장했나 보다. 계획에 없던 물품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누가 그랬지? 배고플 때 절대 장 보는 거 아니라고...

아무튼 정육점을 지나 건너편에 울긋불긋 잠옷이며,  내의를 파는 집이 있다. 엄마 내의랑 내 내의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내의는 자줏빛으로 고르고 -나는 매우 흡족했다.. 담에 요양원 갈 때 드려야지...

 좁은 길을 가다 보면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힐 수도 있다. 나는 최대한 조심하는 편인데,'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지 않네.' 씁쓸하다.

 쭉 중앙쯤 걸어 올라가니 군고구마를 파는 곳이 곳이 나왔다. 해마다 군밤, 군고마는 지천으로 먹었는데... 언제부터 귀한 음식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5000원어치를 샀다. 갈색 서류봉투 같은 곳에 담아 주신다.

 허기진 틈에 장을 보느라 순전히 주전부리 위주의 장을 보고 있으니 나도 철딱서니는 없다.ㅎㅎ

 혹한에도 물건들을 파시려고 나와 애쓰는 모습이-저분들도 누구의 엄마, 아버지, 오빠, 딸, 할머니겠지.

 좀 숙연 해졌다.

 바닥에 비릿한 물이 흥건한 생선 코너 앞을 스무 걸음쯤 지나니 엄마가 가끔 내게  사다 주신 떡이 보인다. 엄마랑 나는 시루떡을 좋아하는데, 엄마는 쫀득한 찹쌀이 든 찹쌀떡 위에 팥고물을 올린 시루떡을 좋아하시고 난 맵 살로 지은 떡 위에 얹은 팥고물을 좋아한다.  엄마는 찰기를 좋아하고 난 떡이 고슬고슬하고 부슬부슬한 맛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김이 모락 나는 떡 한팩을 고구마와 함께 코트 안에 품고 장바구니에 내의랑 과일을 담았다.


 경기가 안 좋아 힘들다 해도 왠지 시장은 사랑들이 역동성 있게 움직이며,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피력하는 공간 같아 좋다.

 나는 오늘 싼값에 장을 보기도 하고 엄마와 장본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힘든 와중에도 열심히 일하는 소시민의 모습을 본 것이다.

 다시 시장 안쪽에서부터 우리가 들어온 초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이 파세요."

 "많이 파세요."

  내가 그분들에게 힘을 보탤 것은 이런 인사밖에 없다.



 다시 세정거장을 눈길을 피해 집으로 걸어오니 몸이 노곤해졌다. 늦은 점심이다. 먼저 아직 온기가 있는 군고마를 접시에 담아 먹는다. 겉은 바싹하니 안은 꿀이 흐르듯 달콤하다. 두 개를 연거푸 먹으니 배가 부르지만 행복한 나른함이다.

 잠시 엄마 내의를 세탁해서 건조대에 널어두었다.

벌써부터 엄마에게 갖다 드릴 날이 기대된다.

 '배불러도 떡을 맛볼 배는 따로 있지.'

 포슬포슬한 시루떡을 한 잎 크기로 잘라 베어 문다. '크~으  정말 맛있다.'

  거울 속에 있는 머리 길이가 짧고 상큼한 여인네가 웃고 있다.

어느새 행복이란 놈이 또르르 다가와 겨울 안의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는 항상 거울 속에 있었어요. 당신이 날 발견하면 나는 쏜살 같이 달려갈 거예요.


' 깜박 졸았나?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또르르, 또르르  점점 가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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