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밤산책

밤산책 17: 지하철, 스쳐가는 안녕을 빌며

by 말로

지하철 편도 한 시간 남짓한 출퇴근길에서는 때로 낯선 장면이 기억에 오래도록 머물기도 하고, 늘 보던 풍경이 문득 색다른 인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오늘은 낯선 모습과 익숙한 풍경이 교차하며 하나의 상념으로 이어지는 묘한 경험을 했다.


첫 번째 풍경은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슬리퍼에 구겨 신은 듯 뒤틀린 발을 힘겹게 디디며 껌을 팔고 있었다. 그는 껌을 팔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영락없는 걸인의 행색이었다. 어눌한 말투로 "껌 하나 사주세요!" 외치며 지하철 한 칸을 오갔다. 사람들은 곁눈질로 그를 살피면서도, 시선이 마주칠세라 황급히 눈길을 거두었다. 어떤 이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대부분은 마치 그가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하던 행동과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다. 나 또한 그 침묵의 군중 속에 묻혀 어색함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지갑 속 천 원짜리 몇 장의 존재를 떠올리면서도, 내 시선은 하릴없이 휴대전화 화면 위에 머물렀다.


그때, 한 청년이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가 돈을 무심히 건넸다. 얼핏 보아도 오천 원은 되어 보였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선뜻 오천 원을 내미는 것은 드문 일이지 않은가. 껌 파는 남자도 놀란 듯 "고맙습니다"를 연신 말하며 껌을 건넸지만, 청년은 껌을 사양하고는 이내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어쩌면 껌 파는 남자는 정말 다리가 불편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실제로는 보이는 것보다 형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정한 잣대로 본다면, 혹은 공공질서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그를 돕는 것이 적절치 못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판단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그 순간, 청년은 남자의 속사정이나 진위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저 돕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 충실했을 뿐이지 않았을까? 그의 행동은 어떤 논리나 타산보다 앞선, 따뜻한 인간 본연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또 다른 풍경 하나가 이어졌다. 내 앞자리에는 한 청년이 가방을 가슴팍에 꼭 움켜쥐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가방에 파묻은 채,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얼마나 고단했던 것일까. 손에 아슬아슬하게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기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깊은 잠에 취해 있었는지, 그는 한참 뒤에야 어렴풋이 눈을 뜨고는 휴대전화를 주워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손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섣불리 말을 걸거나 깨우기도 어려워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밤새 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밤을 지새웠는지, 아니면 고된 야간 아르바이트 끝에 지친 몸을 가방에 기댄 채 잠든 것인지, 혹은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밤새 뒤척이다 새벽 첫차에 몸을 실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그 청년이 오늘 밤만큼은 편안히 잠들기를 바란다. 마치 껌 파는 이에게 선뜻 오천 원을 쥐여주던 그 청년의 마음처럼 말이다.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그 순수한 바람처럼, 피곤에 지친 그 청년이 오늘 밤에는 부디 고단함을 내려놓고 깊은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상대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저 그의 편안함을 빌어주는 이런 마음 한 조각이 아닐까.


분주한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도, 때로는 이름 모를 타인에게 보내는 작은 관심과 연민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따뜻한 시선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 지하철에서 어처구니없는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다행히 시민들의 차분한 대처와 신속한 대피 덕분에 더 큰 인명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일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2시간씩 보내는 나에게는 충격적이었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사로운 개인적 분노를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며 타인의 생명과 그 공간이 품은 수많은 사연을 하마터면 앗아갈 뻔한 행동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반사회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이었다.


오늘 밤, 무고한 시민들을 위협한 그릇된 분노에 치가 떨리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위태롭고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더 큰 비극으로 번지지 않은 것에 대한 깊은 안도와 감사가 교차하며 쉽사리 잠들지 못할 것 같다.


https://youtu.be/nQNLhUl7AfQ?si=euPBlV_Sb60E7K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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