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모든 게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길을 찾기도 하거든...
행운이다. 아니 좀 더 감정의 과잉을 섞어 오버하자면 횡재랄까...
장바구니 자투리를 예산에 맞추기 위해 선심 쓰듯이 ‘옜다~’ 하고 샀던 책이 읽는 내내 흥분시킬 줄은 몰랐다.
이 책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은 책 표지가 낯익어 마치 읽은 책이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다.
그 이유는 가끔 아마존 북 베스트셀러나 뉴욕타임스 북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릴 때마다 (절대 할 일이 없어서는 아니다...) 차트에 <가재가 노래하는 곳>과 함께 오랫동안 생존 깃발을 휘날리고 있어 잔상이 남았던 책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기에 이렇게 끈질기게 차트에 남아 있을까? 미국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도 되나?’ 하며 갸우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갸우뚱은 좋은 소설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새삼스러운 확신과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몰입과 거리에서 주인공 미라와 펄을 본 듯한 착각과 내 속에 죽었던 감동을 되살리는 회생의 기적으로 탈바꿈했다. 읽던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에 푹 빠질 수 있는 책이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끔찍하고 잔혹한 스토리로 인간의 밑바닥을 파헤치거나 반전으로 뒤통수에서 괘종시계가 울리는 이야기를, 어떤 이는 현실의 사회 문제에 대한 명쾌한 통찰과 삶의 방향을 잡아 주는 이야기를, 어떤 이는 읽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를…혹은 캐릭터가 다차원적이면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하고, 스토리가 개연성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는 구조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에게 좋은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지고, 읽고 나서 문득 바라본 거리의 사람들이 특별한 사연과 의미로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마구 샘솟게 하는 소설이다. (그냥 감동받았다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주절주절…)
실레스트잉의 <작은 불꽃은 어디에나>는 나에겐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가 왜 리처드슨 저택에 불을 질렀을까?”
클리블랜드의 고요하고 우아한 계획도시 셰이커하이츠. 이곳에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도로 구획부터 주택 외벽 색깔 그리고 주민들이 나아갈 성공적인 삶의 방향까지. 변호사인 리처드슨, 지역 신문사 기자이자 셰이커하이츠의 정신을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리처드슨 부인, 십 대 아이 넷 (트립, 렉시, 무디, 이지). 셰이커하이츠의 모든 주민이 그렇듯 이들의 삶은 풍요롭고 합리적이며 안정적이다. 누구도 자기 인생에 의문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앞에 수수께끼 같은 예술가이자 미혼모인 미아가 딸 펄을 데리고 리처드슨 집안의 세입자로 들어오면서 곳곳에 작은 불씨들이 거친 불이 되어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해 맹렬히 타오른다.
불씨는 여러 가지 불쏘시개를 옮겨가며 타오른다.
풍요와 빈곤, 규율과 자율, 인종과 문화, 낳은 정과 기른 정, 부모와 자식, 얻은 것과 잃은 것 … 하나의 소설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풀어갈 수 있는 작가 실레스트 잉의 능력이 놀랍기만 하다.
백인 상류층의 위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가면을 쓴 허세가 자유로운 예술적 영혼을 만나 민낯을 드러내고 깨어지는 과정이 인종의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얼핏 연결되지 않는 문제까지 한 궤에 담는 솜씨는 실레스트 잉의 차기작을 묻지 않고 예약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다.
또한, 이 책은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드라마 <Little Fires Everywhere>로 아마존 프라임에서 볼 수 있다. 더구나 한국어 자막으로!
막장 드라마 같으면서도 문학적인, 말초적인 것 같으면서도 중추적인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기억해. 때로는 모든 것을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어.
타고난 뒤 토양은 더 비옥해져서 새로운 것들이 자라날 수 있게 돼.
사람들도 마찬가지란다.
다시 시작해.
길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