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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세계로의 초대장

by 말로

살다 보면 유독 깊게 파여 자꾸 발이 빠지는 인생의 한 구멍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그 당시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단짝 친구와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서로가 낄낄거리고 까불고 장난치며 신호등이 없는 시장 건널목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뛰며 건너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앞서 건너가던 그 친구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랐다. 차에 치인 것이다.

만화경 속 장면이 갑자기 바뀌듯 세상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멍한 상태로 서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땅에 떨어지는 그 친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친구는 분명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외침을 눈빛 속에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다행히도 그 친구는 크게 다치지는 않았고, 얼마간 병원 치료 후에 등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고 이후 더 이상 그 친구와 어울려 다니지 않았던 것 같다.

이후 그 친구와 관련된 기억이 아무것도 없다.


마치 유년기를 지나오지 않은 마냥 어릴 적 기억의 함이 텅 비어 있지만, 이 장면만큼은 뚜렷하게 손에 잡힌다.

요새도 가끔 그 친구가 공중에서 떨어지며 뭔가를 말하는 듯한 그 눈빛이 저쯤에서 보이는 것 같다.


이 책 피에르 르메트르의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을 읽는 내내 그 친구의 눈빛이 생각났다.

주인공 앙투안의 의식으로 들어간다.

프랑스의 시골 마을. 열두 살의 앙투안은 조용하고 고독한 소년이다.

어린 그로서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이러한 그에게는 정신적으로 위안을 주고 친구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이웃집 강아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강아지를 주인이 총으로 쏴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충격 속에 휩싸인 앙투안은 숲에서 우연하고 돌발적인 상황에 의해 강아지 주인의 여섯 살 아들을 죽이고 만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앙투안은 숲 속에 소년의 시체를 숨기게 되고, 실종된 소년에 대한 고강도 수사와 동네 주민들이 동원된 전방위 탐색이 시작된다.

그러나, 수사와 탐색은 여러 예기치 않은 상황에 의해 난항을 겪게 되고 끝내 중단된다. 즉, 앙투안이 숨긴 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아직까지는….

앙투안은 결코 의심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소년의 죽음은 앙투안의 마음에서 떠난 적이 없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 후, 10년도 더 지난 현재로 소설의 시점이 옮겨온다.

파리에서 의사로 살고 있고, 미래를 약속한 약혼자가 있고, 숨겨진 비밀의 살얼음도 못 느끼게 안정감 있던 앙투안.

하지만, 고향 숲 속 깊이 묻어두었던 소년의 시체가 발견됨에 따라 그의 인생은 모호한 안갯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날의 비밀이 묻혀있는 안갯속으로…


소설 속 앙투안만큼의 끔찍함과 극단적인 사건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릴 적 비밀을 품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들.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까지 삶 전체를 두루는 장막이 되기도 하고, 가끔 회상과 꿈속에 삽입되는 한 토막으로 남기도 한다.


이 책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은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문법을 가져왔지만 그 쓰임은 특별하다.

12살 어린 소년의 범죄가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그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앙투안의 심리적, 상황적 묘사가 공감의 공백을 메워주기에 충분하며, 이후 벌어진 수사와 탐색 과정에서 비밀이 지켜지는 과정도 흔히 생각하지 못한 우연이 충분한 개연성으로 연결된다.

소년 앙투안의 살인이 과연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지, 어른 앙투안은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인지, 치르게 된다면 어떻게 치를 것인지, 앙투안이 감당해야 할 비밀 무게가 또 있지는 않을지...


이 책의 저자 피에르 르메트르는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세상의 구분이 얼마나 모호하고 쓸데없는 짓임을 깨닫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글 솜씨만큼이나 포스도 남다르다

56세의 늦은 나이에 ‘카미유 베르호벤’이라는 형사를 창조하여 <이렌>이라는 추리소설로 데뷔한 그는 추리소설 장르에서 프루스트와 발자크, 도스토옙스키의 문체를 느끼게 한다는 문단의 호평으로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발표되는 추리 장르 작품들의 연이은 문학상 수상은 <오르부아르>에 이르러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이라고 인정하는 '공쿠르’까지 수상하게 된다.

이 책 <사흘 그리고 한 인생> 은 작가가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프랑스를 그리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인 <오르부아르>와 <화재의 색> 사이에 발표한 300여 쪽의 소품이다.

뛰어난 스토리텔러가 풀어가는 짧지만 깊이감 있는 감정과 의외의 사건과 반전이 있는 이 이야기는 그의 작품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위한 워밍업으로는 숨이 가쁜 작품이다.



저는 56세가 되어서야 작가가 되었습니다.
50년을 생각한 끝에 작가가 된 것이죠.
작가가 되기 위해 50년을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충분히 생각하기 위해서는 50년이 걸리리라 생각합니다.(웃음)
성급한 편이라면, 멋진 선택을 하기 위해 50년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삶에서 얻은 교훈은 모든 것이 어떤 사람에게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작가가 된 것은 모든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없고, 나이도 많이 들고, 작가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저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노력을 했습니다.
나의 욕구였죠. 정말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의지로 변화시킨 것이었어요.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 ‘15년 방한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피에르 르메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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