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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Mar 18. 2024

Z 세대가 내 학생들이어서

 

내가 처음 가르친 학생들은 서른 살이 넘었다. 일곱 살 때 만난 애도 있고, 중고생 때 만난 애들도 있다. 제자가 대략 오백 명은 넘고, 천명은 못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이나, 소그룹으로 22년 동안 가르쳐 왔으니. 학원 선생이지만 지금도 늘 소식 전해오고, 찾아오는 제자들도 있어 보람을 느낀다. 이제 부지런히 제자들 결혼식에 가주려 하는데, 여학생들 몇은 이십 대에 갔지만 남자들은 도통 장가를 안 간다.      

 

네 번의 대목     


나는 일 년에 네 번 대목을 맞는다. 1학기 중간 기말시험과 2학기 중간 기말 시험기간이 되면 내 생활은 사라지고,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몰두하는 시간을 ‘대목’이라 부른다. 그 기간 동안 일 밖의 활동은 모두 멈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능한 한 양질의 자료를 준비하고, 출력하여 일터로 달려가 아이들과의 마지막 마무리에 힘쓴다.     

밥도 불규칙적이고, 하루 종일 앉아 있으니 소화도 되지 않고, 밤이면 목이 아파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치지만, 이유 있는 노력인 탓에 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수능 같이 큰 시험이든 일 년에 네 번 치는 정규 시험이든, 시험에는 늘 크고 작은 드라마가 생기곤 한다. 

100점을 맞던 아이들은 여전히 100이나 하나 틀린 정도이고, 7~80점 대로 기대되었던 아이들은 그 정도 범위에서 머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매번 작은 기적들은 있었다. 그걸 시험 직전이 되면 나는 아이들에게서 미리 감지한다. 

          

“니들 이마빡에 점수가 보여.”     


시험 전날에 이 말을 하면, 알려 주세요, 알려 주세요, 난리들이지만 딱 잘라 거절한다. 예측이 틀릴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실 선생이야 점수가 예상될 수밖에 없다. 아이의 언어 능력, 그간 공부한 양과 깊이, 성실도, 문제 푸는 실력을 죽 보아 왔으니 마지막 예상 문제의 결과를 보면 짐작이 가는 게 당연하다.     


시험을 마치면 점수 잘 받은 아이들이 가장 먼저 전화한다.

“선생님, 저 다 맞은 거 같아요.”

“저 드디어 80점 넘었어요.”

들뜬 목소리로 감격하며 전화를 걸어오는 아이들에게 웃으며 잘했다고, 고맙다고 전한다.      

     

“천재는 없다, 매일매일이 있을 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말을 자주 한다. (사실 천재는 있지만.)

다른 공부보다 외국어는 매일 일정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하려고 애쓰는 아이, 성실하게 공부해나가는 제자들을 아낌없이 격려하고, 삐끗하여 옆길로 가려는 학생들을 제 길로 끌어들이는 게 내 할 일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 인내심이란 신랄한 농담도 있었다.      


가장 잊히지 않는 제자는     


그 애는 수업 시간 말끄러미 날 쳐다만 보고 반응이 없어 진땀 뺐던 제자였다. 좀 나른한 분위기의 예쁜 중학생이었는데 공부를 안 한다고 했다. 

마지못해 수업을 따라 하던 아이가 나하고 친 첫 시험에서 성적이 조금 오르자 의욕을 보이며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잘한다고 하더니, 언어에 감각이 있던 아이여서인지 습득이 빨랐다. 다음 시험에서도 또 올랐고, 그때부터는 아이의 자세가 틀려지고 자주 환하게 웃었다. 무엇보다 날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결과가 좋은 아이는 대부분 선생을 전폭 믿고 가르침을 따르는 아이들이다.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른 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했단다.

“엄마, 내가 영어 90점 넘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

엄마와 나는 무엇보다 아이의 의욕이 살아난 게 기뻤다.

그 애는 95점을 맞았다.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준 덕분에 좋은 성적을 냈어요.”

란 흐뭇한 문자를 받았다. 

영어를 잘하게 되면서, 다른 과목도 의욕을 내게 되어 차차 모든 성적이 올랐다. 

그 아이는 고등학교에서도 계속 성적이 올라가서 좋은 대학도 가고, 취직하여 지금도 가끔 제주도에 그 이쁜 얼굴을 보여주러 온다.     


나는 그 애에게 큰 것을 배웠다. 사람이란 게 일단 한 번 계기가 되어 자신감을 얻으면 상승의 기운을 타고 끝없이 올라간다. 내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내 직업은 서비스업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천만에. 아이들이 얼마나 성적의 변동에 울고 웃는지 현장에서 보는 사람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성적과 나중의 행복한 삶이 비례하진 않지만, 성적에 따라 지금 아이들은 행복과 아픔을 겪는다.       

나는 내 직업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을 돕는 게 내 일이라 생각하고 기꺼이, 즐겁게 내 일을 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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