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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낀느 Mar 02. 2024

Villon, 프랑수아 비용을 공부해서

     

1328년 발루아 왕조의 등장은 중세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14․15세기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가 된다. 1337년 시작된 백년전쟁과 흑사병 등 온갖 혼란과 고난을 겪으면서 봉건제도와 교회라는 이중의 조직에 의해 지탱되어 오던 중세사회는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문학도 신앙과 명예와 연애 속에서 기사의 무공을 이상화해 왔으나 바닥이 드러난 영감 대신 기묘한 기교가 판치게 되어 시가는 ‘수사학 rhétorique’이라 불리게 된다.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공백기가 되는 이 시기는 서정시의 앞날을 계시하는 천재 시인 비용 등에 의해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중세시의 최후를 장식하며 동시에 새로운 시적 세계의 지평을 연 프랑수아 비용과 더불어 우리는 빅톨 위고가 보들레르에게 말했던 <새로운 전율>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1431년 영국의 지배하에 역병과 기아로 수많은 생명을 잃은 빠리의 가난한 골목길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수아 드 몽꼬르비에 François de Montcorbier가 본명이었으나 아버지를 여의고 사제(司祭) 기욤 드 비용 Guillaume de Villon의 보호를 받고 자랐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하여 학사를 딴 후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범죄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1445년에는 한 사제를 살해한 혐의로 법의 추궁을 받아 빠리에서 피신해야만 했고, 그 후 사면령을 받았으나 다시 강도 사건에 연루되었다. 재차 빠리를 떠나 각처를 떠돌아다니던 그는 여러 사건에 말려들어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사면은 받았으나, ‘비용이라는 자의 고약한 생활을 감안하여’ 10년간 추방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2세였고, 그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빠리의 공원에서 만난 비용 동상

 

 끝없는 방랑, 범죄, 사면, 추방, 다시 범죄로 이어진 그의 삶은 시를 노래할 수 있는 상황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비용은 악의 그늘에서 고통스럽게 지탱하여 온 삶에서 처절하고 감동적인 시를 끌어냈다. 이 시들이 낭만적인 꿈, 그리움의 탄식, 신비로운 사랑의 환상 따위를 노래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비극적이었던 삶에서 그는 수없이 좌절과 환멸, 절망과 회한을 되씹었을 것이고, 결국 그의 시는 상처 입은 영혼의 울부짖음일 수밖에 없었다. 궁정풍의 고상하고 우아한 시나 <장미 이야기>와 같은 감정적 유희나 관념론과는 판이한 그의 시 세계는 현실과 삶의 직접적이고 가식 없는 만남에서 작열하는 인간적 진실의 불꽃 같았다. 그의 시에는 놀랍도록 근대적인 감각이 고동치고 있으며, 보들레르의 <악의 꽃> 중세판 같은 인상을 준다.    

 

헛되이 보낸 젊은 시절에 대한 깊은 회한과 함께 

인간의 무력과 비애를 읊은 <회한 Regret>, 

시간의 덧없음과 인생의 허망함, 특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무상을 노래한 

‘작년에 내린 눈 지금 어디에? Mais où sont les neiges d'antan?’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흘러간 귀부인들의 발라드 Ballade des dames du temps jadis>, 

이미 죽은 사형수의 입을 통해 처절한 죽음의 비전을 전하는 

그의 마지막 유언 <비용의 墓碑銘-발라드형식의 시- L'Epitaphe de Villon -en forme de ballade->등은 길이 남을 것이다.     



<François Villon 年譜>


1431년 빠리 출생.

1447년 (16세) 빠리 대학 입학 자격 취득.

1452년 (21세) 소르본느에서 문학사 학위 취득.

1455년 (24세) 사제와의 언쟁 중 칼로 그를 찌르고 빠리에서 도주.

1456년 (25세) 1월 국왕의 사면장을 받고 빠리로 돌아옴. 12월 크리스마스 저녁부터 '유증시'를 써 밤에 마침(추정). 또 그날 밤 나바르 신학대학에서 친구들과 함께 5백 에퀴를 절도 후 도피.

1457년 초~1461년 말 종적이 밝혀지지 않음.

1461년 (30세) 여름,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오를레앙 감옥에 갇혀 있었음. 10월 2일 석방되어 빠리로 돌아옴. 

1462년 (31세) 나바르 절도사건이 해결 안 되어, 숨어서 '유언시'의 상당 부분 집필. 연말에 싸움하다 공증인에게 상처를 입혀 검거되어 교수형 선고받음.

1463년 (32세) 1월 5일 상고가 받아들여져 교수형을 면하고 빠리에서 이후 10년간 추방한다는 판결받음. 그 후의 종적은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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