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비 좀 왔다고 온 도시가 마비야

뉴욕 한 달 살기 14

by 꼬낀느



9월 29일 금요일 아침 8시. 나는 1번 지하철을 타고 다운타운에 공부하러 가는 길이었다. 비가 세차게 왔지만, 서귀포에 사는 사람에게는 이쯤이야 뭐. 한라산에 폭우가 내릴 때 운전하고 가면 아무리 세차게 와이퍼를 틀어도 앞이 제대로 안 보인다. 그럴 때는 무조건 속도를 가장 낮춰서 그 구간을 지나야 했다. 집 옆 감귤 농장의 나무 위로 내리는 서귀포 비는 자박자박 속삭이듯 아래로 오지 않았다. 바람을 동반하며 가로로 내릴 때도 많았다. 눈도 옆이나, 사선으로 내릴 때가 많았다. 그런 변덕 심한 기후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비? 오는구나 했다.


지하철은 자주 멈췄다. 그때도 몰랐다. 그게 비 때문이고, 사태가 점점 심상찮아진다는 걸. 보통보다 15분쯤 늦어서 렉터 스트리트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수업에 늦었구나 했더니, 건물 입구에서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셋이 웃으며 수업에 들어갔더니 단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 비 때문에 늦어서 그제야 도착한 것이다.


수업 중에 비상 알림도 두 번 왔다. 음, 미국도 이런 거 오는구나.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가능한 한 빨리 귀가하라고 조언해도 그러려니 했다. 솔직한 내 심정은,

‘뭐야. 비 좀 온다고 왜들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랬다.

한시에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아뿔싸. 이미 다운타운을 지나는 지하철이 다 끊어졌고, 지하철 입구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버스를 검색해서 정류장에 가서 기다렸더니, 안 그래도 약속 잘 안 지키는 버스들이 아예 오지도 않았고, 오더라도 ‘서비스 불가’ 싸인을 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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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했다.

거기서 집까지는 약 9km. 걸어서 가면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날씨는 여전히 바람도 불고, 비도 세차지는 않았지만 내 작고 약한 우산은 종종 뒤집히기도 해서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그리고 도심에서는 신호등 때문에 시간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이미 다운타운은 교통이 엉망진창이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로 도로도 만원이었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차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택시나 우버는 무리다. 일단 걷자!’

기왕 걷는 거 즐기기로 했다.


나는 97년 8월에 동생 영민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처음 뉴욕에 왔었다. 그때 동생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살았다. 소호와 그리니치 빌리지가 있는 다운타운은 당시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동네였다.

워싱톤 스퀘어를 지나며, 젖어 있는 아치를 바라보다 브로드웨이로 접어들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동생이 졸업한 뉴욕대학(NYU, New York Univ.)이 있다. 한국같이 담 있고, 캠퍼스 있고 그런 대학이 아니라 법과 대학 건물, 교육대학, 학교 영화관(Cantor Hall) 등이 주변에 모여 있으니 그리니치 빌리지 자체가 뉴욕대학의 캠퍼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나는 그날 일기에 썼었다.

<그 어느 날인가 다시 한번 나 혼자 소호를 거닐 날이 있으리라 기대를 갖고 산다. >


버스 정류장마다 기웃거리며 14가까지 걸어오니 이미 걸음이 만 보가 넘었다. 점심도 굶었고, 다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그때 버스 정류장에, 할렘 가는 버스가 정차해 있는 것을 보았다. 북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싶어 무조건 일단 탔다. 마침 앉을자리가 있어 자리에도 앉았다.


나는 운이 아주 좋았다. 그 버스는 7번가를 쭉 타고 올라가서 66번가 우리 집 동네를 지나가는 버스였다. 단, 14가에서 66가까지 가는데 무려 한 시간 20분이 걸렸다. 버스는 만원이고, 길은 차로 꽉 막혀 운행이 더뎠다. 그래도 난 앉아서 가니 고생을 덜했다. 만일 서 있었더라면 참지 못하고 내렸을 것이다. 걸어가나, 타고 가나 거의 시간이 비슷할 정도였다.


버스에 서 있던 한 흑인 아줌마가 탄식을 했다.

“길에서 세 시간째야!”

그날 나는 보통 때면 40분이면 오는 길을 4시간 걸렸다.


그래도 뭐 이만하면 운 좋았다고 여겼지만, 도무지 이 도시의 하수 시스템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의 가족들이 걱정해서 안부를 물었지만, 내 생각에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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