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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Aug 13. 2020

[수플레] 축가를 고민 중인 당신에게

ep.25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결혼식의 백미, 축가. 요즘은 축주나 축무 등 다양한 형태로도 변용되고 있지만 역시 사람의 목소리만큼 감동을 주는 것도 없다. 최근 유튜브에서 <그대라는 사치> 축가 영상을 본 뒤로 노래에 아주 빠져 있다. 일반인 영상이었는데 아주 편안하고 달달하게 잘 불러서 보는 내가 다 감동받을 정도였다. 댓글로는 자기도 축가를 부탁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덩달아 나도 축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나는 뭘로 축가를 하지. 누구한테 부탁하지. 그래서 준비했다. 이번 글은 축가 특집, 내가 여태껏 아껴 왔던 축가 후보 top 3 대방출이다. 결혼할 일도 없는데 무슨 헛짓이냐고? 그냥. 재밌잖아.




1.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원곡 : Take me as I am)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 나를 사로잡은 곡. 이 곡을 시작으로 잠재적 축가 리스트를 정하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체성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지킬과 그걸 보듬어주는 엠마의 사랑의 맹세가 담긴 아름다운 노래. 다소 짧은 길이지만 여운은 전혀 짧지 않다. 링크된 영상은 무려 15년 전의 것! 조승우와 김소현이 그때도 저렇게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원곡과 한국어 버전 가사의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다른 언어가 주는 감동이 각자 새롭다.

Though fate won't always do what we desire
Still we can set the world on fire

Give me your hand, Give me your heart
Swear to me we'll never part       

You know who I am / This is who I am
Take me as I am
우린 이미 알아요 운명을
함께 걸어가야 할 길

손을 내게 마음을 내게
변치 않을 맹세를

당신만 나를 받아준다면
당신의 나를

나는 이 노래만큼 완벽한 축가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결혼식에 자주 등장하진 않는다. 왜일까? 대중적이지 않아서? 성악이라 부르기 어려워서? 혼성 중창이라 인건비가 따블이라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튼 조금 아쉽다.

 



2. 검정치마 - 한시 오분

이건 축가라기보단 퇴장곡으로 하고 싶은 노래다. 사실 입장곡이든 퇴장곡이든 아니면 연회장에서 울려 퍼지는 배경음악이든 아무래도 좋다. 처음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 노래는 누군가의 결혼식에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검정치마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아는데, 단연컨대 그는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틱 가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가사의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없다. 게다가 이런 펑키한 사운드라니. 피로연장에서 이 반주에 맞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출 수도 있겠다. 내가 신랑이어도 말이다. 조휴일만의 몽환적인 보이스에 사람들은 마취되고, '아직 흑백영화처럼 서로 사랑하는' 두 주인공만이 거기 있을 것이다.  


축가와 별개로 요즘도 이 노래를 가끔 듣는다. 들을 때마다 한시 오분처럼 나 하나만 보는 누군가에 대한 상상을 자꾸 하게 되고, 나를 매일 다른 이유로 더 사랑해줄 사람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품게 만든다. 그 기대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만.




3. Adam Driver - Being alive (원곡 : 뮤지컬 <Company>)

비교적 최근 추가한 곡으로, 영화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에 등장한 노래다. (40년 전의 뮤지컬 <Company>에 수록된 노래가 원곡이다)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본 탓에 노미네이트 하긴 했으나 막상 이걸 축가로 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영화가 계속해서 이혼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탓이다.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의 독무대도 어쩐지 구슬프다. 하지만 이걸 선택한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가사 때문이다.

Somebody crowd me with love 넘치는 사랑을 주는 사람
Somebody force me to care 관심을 요구하는 사람
Somebody let me come through 내가 이겨나가게 해 주는 사람

I'll always be there 난 늘 그 자리에 있을 거야
As frightened as you 너만큼 겁은 나지만
To help us survive 같이 살아가야지
Being alive 살아가자
Being alive 살아가자

결혼이라는 것이 새로운 로맨스와 화목한 가정과 순탄한 미래가 결합된, 이른바 선물 세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는 귀찮은 매듭도 지저분한 포장지도 또는 막상 열어보니 내용물은 쥐꼬리인 본품도 함께 들어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혹은 더) 고뇌하다 안도하다 또 금세 절망하는 일의 반복일 수도 있겠다. 이런 본질 같은 걸 어렴풋하게 눈치챈 다음부터는, 검은 머리 파뿌리 운운하며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언약보다는 서로 부족하지만 기꺼이 함께 삶의 풍파를 헤쳐나가자는 고백이 좀 더 와닿는다. 사실 영원에 관한 약속보다 오만한 건 머리카락에 대한 저 당연한 믿음이다. 검든 희든 언제까지 얌전히 붙어있을 줄 알고.




축가에 대해 길게 늘어놓았지만 사실 하객 대부분은 노래엔 관심이 없다. 신랑 신부의 연인 시절 사진들이나 정성 들여 준비한 예식의 식순 따위는 더더욱 뒷전이다. 그저 밥, 밥이 최대 화두일 뿐이다. 결혼은 너희들이 하는 거고 밥이야말로 내 입에 들어가는 거니까. 평범한 아줌마와 아저씨도 결혼식 연회장에서는 미슐랭 비밀 특파원을 방불케 하는 미식가와 산해진미 앞에서도 냉정 평론가로 둔갑한다. 그러면서 식당의 규모와 메뉴의 다양성, 쌀알의 점도와 고기의 익힘 정도 등에 까다롭게 점수를 매기곤 한다. 그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보지만,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맘에 안 드는 음식 앞에서는 한없이 깨작대다가도 어쩌다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하면 신나게 욱여넣기 바쁘다. 변명을 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에게도 낭만이 남아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날엔 그 날의 축가를 궁금해하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걸 보면 그렇다. 누군가의 마음이 어떤 목소리를 통해서 전해질지, 어떤 선율이 두 사람의 소중한 날을 풍성하게 장식할지 내심 기대가 크다. 그 앞에서 신랑 신부 혹은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은 어떤 표정이 될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래도 진심이 기다려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뷔페 메뉴 다음으로.


(2020.08.13)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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