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물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니다. 변명을 하자면 그건 나의 빌어먹을 완벽주의 때문이다. 이왕 선물을 할 거 최적의 선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그 때문에 선물을 고르는 일은 나에게 하나의 미션이다. 가볍게 기프티콘을 보낼 때도 그렇다. (으레 그러하듯 치킨이나 스벅티콘을 보내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어떤 선물을 골라야 하지. 실용적인 것? 가격대가 적당한 것? 아니면 그의 취향에 맞는 것? 최대한 합리적이고 적절한 선물을 고르기 위해 늘 고뇌한다. 선물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새 '최단 거리를 구하시오' 따위의 문제풀이를 하고 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생각처럼 잘 안 풀리고, 나는 결국 문제를―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물을 주는 일을―회피하는 사람이 됐다.
선물을 받는 것도 머쓱해서 잘 못한다. 그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을 때가 특히 그렇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조금 오버를 떨어야 할까. 아니면 차분하게 따로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 이도 저도 아니고 늘 그냥 얼떨떨한 얼굴이 된다. (어... 뭘.. 이런 걸 다..) 그러면서 다음엔 이런 거 괜히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곁들인다. 주는 사람 입장에선 아마 '떨떠름한 얼굴로 선 긋는 싸가지'로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딴에는 굉장히 고마워하는 얼굴과 표현인데도.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안 주고 안 받자' 주의다. 선물을 고르느라 머리 아플 일도, 선물을 받으면서 난감할 일도 없도록. 정이 없어 보이긴 해도 까칠하게 사는 건 의외로 꽤 편하다. (그래도 원칙이 있다면, 받은 건 꼭 돌려준다. 은혜든 원수든. 둘 다 이자 듬뿍 쳐서.)
그런데 나의 이런 완고한 가치관에 균열을 내는 이들이 있다. 정작 나는 그의 생일을 지나쳐 버렸는데도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 나의 지나가는듯한 아주 가벼운 호의에도 꼭 무언가로 되갚는 사람들. 어딘가를 다녀오면 꼭 작은 기념품을 사온다던가, 별다른 이유 없이 밥값을 자기가 낸다거나, 오랜만의 조우에도 끝끝내 손에다 무언가를 붙들려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천성적 giver들. 고마운 마음이 들면 꼭 표현해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뭐랄까, 나를 아주 불편하게 한다. 나는 이렇게나 무심한데 그들은 너무 착하고 나이스 하잖아.
지난달에 있었던 내 생일엔 그걸 더욱 많이 느꼈다. 주변 친구들, 선/후배님들, 간간이 소식만 확인하던 먼 친구들, 온라인 친구들, 심지어는 오랜 시간 미처 연락도 못 드리던 교수님까지 내 생일을 챙겨주시고 그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분들의 생일 축하에 몸 둘 바를 모르게 감사했다. 선물의 종류도 다양했다. 각종 기프티콘을 비롯해 와인부터 치즈 나이프, 찹쌀떡, 케이크, 책갈피, 향수, 바디워시, 미스트, 머그잔, 책 등등. 장문의 메시지를 곁들이거나 내 취향을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더욱 고마웠다. 무엇보다 핸드크림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작년 생일 때 받은 핸드크림을 아직도 다 못 썼다)
이 밖에도 많은 선물과 메시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선물의 종류와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오히려 선물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오랜만에 연락해 안부를 나눈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기분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를 잊지 않고 있구나, 내가 생각보다 꽤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고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달까. 이번 생일이 유독 뭉클하게 다가왔던 건 아무래도 요즘 모종의 우울을 겪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신기하다. 마음이 풍요로울 땐 그런 선물들이 온통 부담이었는데, 이렇게 축 처져 있을 땐 선물 하나 연락 하나가 응원 같고 포옹 같아서 괜히 촉촉해지고 그랬다. 나도 앞으로 선물을 할 때는 힘을 조금 빼고 해야지. 선물 자체보다는 사람에 초점을 맞춰서. 선물의 쓰임보다는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앞서 말했듯 선물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까.
그나저나 (이번 생일에도) 선물 앞에서 적절한 얼굴과 표현으로 대답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말해두고 싶다. 제가 선물 앞에서 막 호들갑을 떨지는 않더라도,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라는 걸 알아주세요. 생일 그리고 일상을 챙겨주시는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되갚아 드릴 테니 각오하세요..
아 물론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는 일도 까먹지 않았다. 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방 꾸미기에 착수한 것. 총액 1백만 원 한도 내에서 살뜰하게 진행 중이고 한 달 여가 지난 지금 90% 정도 완성되었다. 전세 기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잘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새로 바뀐 공간에서 며칠 지내보니까 확 다르더라. 진작 할걸 후회가 된다. 여러분도 우울할 땐 집을 꾸며 보시라.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 돈을 아끼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