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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Aug 05. 2021

'극단적 선택'은 없다



언론에선 누군가의 자살 소식을 전할 때 늘 '극단적 선택'이라는 수사를 쓴다. 유명인이건, 일반인이건, 그게 누구냐에 관계없이 한 인간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얼마나 극단적이고 또 비극적인 사건인가. 말뜻 그대로 '끝에 다다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하는 선택은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울 것인가. 우리는 그 마음을 모른다.


그러나 요사이 극단적 선택의 극단성을 통째로 훼손하는 일화가 많이 들려와 뒷골이 팽팽해진다. 이를테면 고 박원순 유족의 '사자명예훼손' 운운이 바로 그것이다. 일 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치권의 커다란 성추행 사건을 기억하는가. 혐의자였던 고 박원순 전 시장의 자살로 '공소권 없음'으로 다소 허무하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혐의 없음이 아니라 기소 대상의 부존재로 수사를 종결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가해자의 유족 측이 되려 소송전으로 뛰어들었다. 해당 성추행 사건은 분명 입증되지 않은 것(이젠 입증할 수 없는 것)인데, 피해자와 언론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결코 밝힐 수 없는) 혐의를 기정사실화해 고인의 명예를 더럽힌다는 논지다. 도대체 누가 고인의 명예를 더럽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처럼 혐의자의 자살로 사건이 정리된 케이스가 결코 적지 않다. 지난 5월 소속 로펌의 여성 변호사를 10회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앞두고 있던 로펌 대표 A는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자신의 사무실에서 목숨을 끊었고, 이에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피해자는 어디에도 읍소를 할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을 물론이고 더 나아가 피의자의 자살이 본인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수면 위로 드러난 '공군 성추행 사건' 역시, 피해자를 회유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이처럼 자살이 특정 목적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것은 굳건한 믿음에 바탕한다. 바로 죽음으로써 혐의를 회피하거나 희석할 수 있다는 믿음. 피해자는 무엇보다 그것을 두려워할 것이라는 믿음. 그렇다면 더 이상 그런 자살에 대해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혐의자들이 '응당' 택하는 최후의 보루 또는 출구 전략이라면 모를까.


가해자 사망 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현행법 상 이런 억울한 결말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도망치듯 죽음을 택한 이는 죽음으로써 타인의 삶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죽음의 보편적 존엄성까지 의심하도록 만든다. 더 이상 개인의 윤리에 기댈 수 없다면 법이 든든한 장치로 기능해야 한다. 그런 사회에서만이 우리는 온전한 삶과 안락한 죽음, 둘 모두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021.08.05)



다행히 현재 이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법안이 논의 중이다. 작년 7월 14일 양금희 의원 등이 발의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성폭력범죄에 대한 고소가 있은 후 피고소인 또는 피의자가 자살 등을 원인으로 사망했을 때, 공소권 없음 처분으로 사건을 종결하지 않고 고소사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뒤 형사소송법 절차에 따라 고소사건이 처리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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