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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Jun 22. 2021

의대가 아니라 한의대를 선택한 이유



간혹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의대가 아니라 왜 한의대를 선택했냐고. 그럴 때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뻘쭘해 대강 둘러대곤 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속시원히 털어놔본다.




입시 때 나는 한의대 딱 한 군데만을 지원했다. 서울대를 갈 수 있을 성적이 아깝다며 원서라도 한 번 넣어보라는 학생 주임 선생님의 권유도, 그래도 의대를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주변 이들의 만류도 내 선택을 바꾸지 못했다. 합격의 기쁨도 별로 크지 않았다. 그저 전액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것이 아쉬웠을 뿐. 열아홉의 나는 조금 건방졌다. 공부만 잘하면 뭐해. 사람이 꿈이 있어야지.

국어 듣기 1번 틀린 건 안 비밀..


어려서부터 내겐 확고한 꿈이 있었다. 사실 그건 의사나 한의사나 가운 입은 전문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요리가 하고 싶었더랬다. 어렸을 때 재밌게 봤던 만화 때문이었을지도, 아니면 맞벌이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레 부엌에 머무를 일이 잦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조리고등학교에 입학하길 희망했으나 부모님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그러면서 하나의 조건을 거셨다. 전문직이 되고 나서도 요리를 하겠다면 그땐 말리지 않으마. 나는 '두고 보자'는 마인드로 공부를 했다.


다행히 성적이 꽤 좋았고, 선택지가 주어졌다. 전문직 중에서도 음식과의 접점이 많은 한의대가 나에겐 가장 끌렸다. 그래, 이왕 요리를 한다면 남들이 할 수 없는 요리를 하자. 의학과 요리를 접목해서 새로운 분야를 열자.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도 좋은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남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어낼 때 희열이 더 컸기에,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도전이 더욱 멋지게 보였다.  


그러나 인생의 문제는 수학 문제 같은 게 아니었으니.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요상했다. 동기들이 응당 하는 수련의 과정이나 빠른 개원 테크를 외면한 채 군대까지 끝마치고 자유인이 되었는데, 오히려 고민이 더 늘었다. 대학 6년 내내 어려운 전공 공부는 등진 채 요리책이나 뒤적거리고, 남들 다 하는 과외는 하지 않고 고된 주방 알바를 기웃거렸는데도, 이제 와서 요리사라는 길로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는 일이 자꾸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주방 일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어마어마한 노동의 양에 압도되었기 때문일까. 주변에 몇 있는 요리사 친구들이 바짓가랑이 잡고 말려서 그런 걸까. 어쨌든 나는 지금 어정쩡한 전문직이 되어 있다.

 

서재 가득 채우고 있는 요리 책들


그리고, 조금 이상하다. 환자 보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지루하지 않다. (이게 바로 부모님의 큰 그림이었을까?) 환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얻는 보람이 꽤 크다. 주변 이들의 소소한 건강을 챙겨줄 수 있다는 점도 만족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특히 여러 병원에서 이런저런 치료를 받던 환자가 나를 만난 뒤로 확 좋아질 때면, 그 쾌감이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러나 여전히 요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서점에 가도 식재료/음식 코너에서 멈추게 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당장 저번 달에만 해도 건강식 관련 요리 코스를 두 달간 듣기도 했고, 요즘은 채식에 관심이 생겨 관련 도서들을 찾아보고 있다.


희미하지만 최종 목표도 있다. 바로 <암 환자를 위한 식이치료 중심 요양병원> 설립. 암 사망률은 점점 높아져만 가는현재의 표준 치료만으로는 항암/수술 후 케어가 충분하지 않다. 알맞은 식사와 운동을 곁들인 일상 속에서의 치료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암 환자들에겐 특히 식단에 대한 정보가 절실하다는 것을,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환자들이 그런 부분에서 방치되고 있다는 것을, 삼 년간의 아버지 간병을 통해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돈'이 되지 않기에 그런 형태의 병원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한때는 설문을 통해 데이터를 모으기도 했다

물론 당장은 자금이 부족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스케일이라 미뤄두고만 있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떠들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그저 나는 음식과 관련된 무언가를 언젠가는 하고 싶다는 마음뿐. 아마도 한의사라는 아이덴티티와 함께.



많이 돌아왔지만 결론은, 내 선택에 만족한다는 것. 다가올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는 것. 지금으로써 나는 환자를 보는 일도 요리를 하는 일도 아직 둘 다 좋고 앞으로도 싫어질 것 같진 않다. 누군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떼돈을 벌어서 평생 놀게 된다면 무엇을 할 거냐고. 글쎄, 나는 돈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더 재밌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소신껏 진료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천직일까? 이번에 브런치 북을 발간하면서 다시금 느꼈다. 나는 내 직업을 꽤나 애정한다는 사실을. 그러다 보니 더욱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 좋은 걸 나만 알고 말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대와 한의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학생 독자분들을 위해 한마디. 이제 전문직 면허 한 장이 당신의 미래를 책임져 주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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