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술이 단지 기술에서 그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것은 내가 의료인의 입장에서 내집단을 대변하거나, 또는 내가 가진 한 줌뿐인 지식을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진료라는 행위가 얼마나 값비싸고 귀중한 업무인지 권위적으로 역설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믿는 까닭은, 진료는 기술 뿐 아니라 마음과 밀접하게 연결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술기를 익히는 데에는 몇 개월에서 몇 년이면 된다. 하지만 타인을 아픔을 보고 아파할 수 있는, 이른바 감수성을 배양하는 것은 몇 년으로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도 더러 존재한다. 설사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해도, 고통으로 예민해진 환자들을 수없이 대하다보면 공감능력이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무뎌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의사는 환자의 아픔을 꼼꼼히 읽어내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이 겪었을 숱한 불면의 밤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맞닥뜨렸을 굴레와도 같은 그 불편들을 상상해내는 데에 힘써야 한다. 타인이라는 물리적 간극을 뛰어넘고 남과 포개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료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고, 이는 의사의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연달아 ‘능력 있는’ 의사 두 분을 잃었다. 두 분의 사인은 각자 다르지만 그 삶을 일구어냈던 동인(動因)은 다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오늘은 몸 세 개와 머리 두 개였어야 했는데 내일은 몇 개가 필요할지 모르겠다던 고인의 글 앞에서 나의 권태로운 일상이 죄스럽다. 그분들의 숭고한 죽음 앞에서 기술이 첨단을 달릴수록 환자와 의사와의 거리는 멀어진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도, 감수성을 기르려는 젊은 의사들이나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환자들도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도 모두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나는 그저, 진료 대기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멍한 얼굴의 수백 수천의 환자들과 그 텅 빈 시간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느라 바쁜, 바빠서 정말 죽을 지경인 의료진들 사이에서, 먹먹할 뿐이다.
(2019.02.11.)
정신의학과 고 임세원 교수는 본인의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2018년 마지막 날 운명을 달리하셨고, 응급의학과 고 윤한덕 교수는 2019년 설 연휴 응급실에서 과로로 별세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