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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Jan 23. 2022

현존을 위한 달리기



나는 원래 달리기를 싫어한다. 어렸을 때부터 뜀박질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체력이 약해 달리기 시합을 하면 늘 꼴찌를 다퉜고, 고등학생 때는 기흉을 앓은 적도 있고 폐활량 자체가 좋지 못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사람들이 왜 그토록 달리기에 열광하는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러닝 크루에도 가입해보고 혼자도 가끔 나가서 뛰어보고 했지만, 아직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달리기가 재밌다고? 도대체 어디가? 나만 이렇게 힘드나..?


러닝을 즐기는 이들이 주변에 늘어날수록 의심은 더 커져만 갔다. 달리기에 열광하는 지금의 문화는 어디서 온 걸까? 어쩌면 나이키 같은 거대 기업이 주입한 환상은 아닐까? 아니면 나를 대상으로 한 사회 실험―예컨대, <트루먼 쇼>나 <벌거벗은 임금님>―같은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진짜 세상은 사실 진즉 멸망했고 도시 러너들의 물리적 동력을 양분으로 돌아가는 그런 끔찍한 매트릭스 세상이 된 건 아닐까? 우리는 외계 세력에 의해 집단 최면에 걸려 있는 건 아닐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


그래도 한강 보는 맛에 가끔 뛰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달리기를 못마땅해하던 내가 올해 들어 매주 2회씩 달리기로 결심했다. 누가 시킨 게 아니고 자의에 의해서. 나름의 목표도 정했다. 

- 매주 5km 이상 채우기
- 매주 두 번 이상 뛰기
- 상반기 누적 거리 총 200km 달성하기
- 5분 대 페이스 유지하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체력과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는 어떤 종류의 '실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삶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실감,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실감,

어제보다 더 나아지고 있다는 실감 같은 것들 말이다.


달리기를 할 때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가를 입증하고 있다 _ George Sheehan조지 쉬언


사실 나는 오래도록 무기력했다. 작년 한 해 동안 마음먹었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오래 우울하기도 했고 지금도 늘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해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가만히 있는 게 불안해 손에 잡히는 대로 뭐라도 하고 점점 더 일을 많이 벌이고 있지만, 바빠진다고 해도 공허한 순간은 늘 찾아온다.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나. 지금 하는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저건 괜히 저렇게 했나.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이 모든 걸 극복하기 위해 달리기를 선택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속는 셈 치고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일례로 오바마 대통령은 '1시간 더 자기'와 '1시간 달리기'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언제나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달리기는 늘 기분전환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다준다는 이유에서다. 아직 기분전환까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알겠다. 

@한강대교

달리기는 '현존'을 가능케 한다. 매 걸음마다 폐와 허벅지가 내지르는 비명을 듣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구나'를 느끼게 된다. 달리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나는 인터넷 세상에 접속되어 있지 않고 누구와 관계 맺지도 않으며 닥쳐올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당장의 다음 한 걸음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쾌한 감각을 한번 느끼게 되면 육체의 통증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정도의 마음이 된다. 


그렇게 얻어진 현존에 대한 자각은 어렴풋한 삶 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위로가 된다. 소비나 유흥을 통해 얻는 인스턴트 힐링이 아니라 단단하고 분명한 위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위로는 누구에게도 얻을 수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는 방법뿐.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늘 무언가 충만한 기분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꼭 현존을 달리기로 느껴야 하느냐고. 다른 쉬운 방법도 있지 않느냐고.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실감의 전제 조건이라고. 나는 결코 마라톤에 도전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말을 조금 알 것도 같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고 정신적으로 물속에 푹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측면도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스포츠에 있어서는 전제 조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여의도


노리고 뛴 건 아닌데 정말 10m 더 뜀

그리하여 오늘도 뛴다. 달릴 때의 목표는 단 하나다. 지난 기록보다 단 10m라도 더 뛰는 것.

 

지금 당장 5km, 10km를 뛰는 건 나에게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지난번보다 단 10m를 더 달릴 수는 있다. 단 10초를 더 뛸 수는 있다. 단 몇 걸음이라도 더 갈 수는 있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뛰며 늘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불안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어딘가 분명한 곳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러너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말이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202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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