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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망할 놈의 결혼을 한답시고

by core


주변 사람들은 묻는다. 이런 자질구레한 글을 왜 쓰기 시작했냐고. 왜 (굳이) 세상에 내놓게 된 거냐고. 혹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나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밖에 답할 수 없다. 스트레스를 받은 뒤 노래방에 가서 꽥꽥 소리를 질러야 하는 사람이 있고, 술을 진탕 마시며 놀아야 하는 사람이 있고, 면벽수행을 하듯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혀야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셋 중 누구도 아니고, 그저 써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썼다. 그게 다다.


우리는 스스로가 게으르며 불안정하고 자기혐오나 두려움에 싸인 존재, 정말 말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직면하는 순간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때 당신은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것이다. 이제 당신은 별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종이 위에 풀어놓아야 하며, 그 가련한 목소리가 들려주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온갖 거창한 텍스트를 곁들여 득도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아직도 억울할 때가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처음 인사드리러 가기로 한 날, 우리 가족들과 함께는 불편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던 그가 불쑥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어디 여행도 아니고 아버지 산소*인데 말이다. 이미 그의 부모님께는 세 번도 넘게 찾아뵈었는데 말이다. 다른 건 다 알겠는데, 모두 내 탓으로 돌려도 다 괜찮은데, 그 사실만은 도무지 이해도 용서도 안 돼서 문득 미칠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런 기도를 한다. 부디 그가 일찍 깨닫지 않길 바란다고.


이렇게 풍경이 끝내주는 곳인데 말이다


그가 일찍 깨닫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건도 상황도 꼭 맞는 남자를 찾고자 오랜 시간 헤맸으면 좋겠다. 본전 생각을 하면서 계속 좋은 사람들을 흘려보냈으면 좋겠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모든 걸 포기하고, 나보다 더 늙고 재미없고 배 나온 남자와 마지못해 결혼했으면 좋겠다. 그 늙고 재미없고 배 나온 남자가 상견례 자리에서 무리수 농담을 던져서 분위기가 싸해졌으면 좋겠다. 그 순간 그의 입은 경련을 일으키듯 억지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 그의 부모님은 상견례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날 떠올리며 '그놈이 참 진국이었는데' 속으로 생각하고 혼자 씁쓸해하셨으면 좋겠다.


그가 원하던 모든 것을 갖추고 살면서, 왠지 모르게 허무했으면 좋겠다. 역세권 신축 40평대 신혼집을 자가로 마련해 놓고, 꽃시장에서 프리지아 한아름을 단돈 몇 천 원에 사곤 온종일 행복해하던 그때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집보다 자주 드나드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평소처럼 익숙하게 파스타를 주문하다가 문득, 내가 해주던 엉터리 까쵸에페페cacio e pepe를 떠올리곤 입맛이 달아나버렸으면 좋겠다. 내 얼굴도 이름도 다 잊었는데도 그 맛만은 잊지 못해서 집에서 혼자 따라하다가 프라이팬 서너 개를 연속으로 태워먹었으면 좋겠다. 늙고 재미없고 배 나온 그의 남편은 맛없는 파스타를 억지로 먹어주다가 배탈이 났으면 좋겠다. 그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묵묵히 파스타에 집착하고, 그의 남편은 실패한 열두 번째 까쵸에페페를 게워내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달라며 절규하면 좋겠다.

오오 린다 아임쏘리 린다

당연히 (레오의 오스카 상 밈을 활용한) 농담이다. 농담과 유머는 미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하다. 은근히 효과가 좋다. 혼자 낄낄대다 보면 분노나 원망은 어느새 온데간데 없다. 그리고 나서 진짜 기도를 얹는다. 그가 잘 되길 바란다고. 누군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제일 좋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가 나보다 더 마음이 넓고 따뜻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 결핍이 적은 사람과 이어졌으면 좋겠다. 단점을 쿨하게 인정할 줄 알고, 고민을 숨기지 않고 건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다. 그가 선택한 남자가 야망 있는 사업가인데다 가족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아내를 가장 끔찍이 챙겨서 주변 여자들의 시기 질투를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 그 남자의 어머니와도 죽이 너무 잘 맞아서, '며느리가 아니라 딸인 줄 알았어요~'라며 주변 사람들이 너스레를 떨었으면 좋겠다. 그가 한 번의 실수를 발판 삼아, 자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하면 좋겠다. 나도 그럴 테니. 당신도 나도, 진심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


*아버지 산소엔 결국 가지 않았고, 그 사건은 아주 큰 계기가 되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싱글 라이프를 더 즐길 기회(?)를 주셨다고 믿는다. 개이득. 오히려 좋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최근 GPT가 사주를 잘 본다길래 한번 속는 셈 치고 돌려봤다. 웬걸, 점쟁이가 따로 없다. 특히 '연애 욕구는 있지만 적극적이지 않다'라고 언급한 포인트가 매우 소름이다. (최근 내 소개팅 카톡이 유출된 걸까?) 그러면서 2026년을 기대하란다. 내 생각보다 조금 이르긴 한데... 하지만 오라, 운명이여. 나는 부단히 준비하고 있을 테니.

망할 놈의 결혼을 한답시고 시즌 2 대기중
우리의 자기 중심성을 바꿀 수 있는 기본 경험 세 가지가 있다. 고통을 겪는 일, 삶에서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는 일, 그리고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의 조건>, 제임스 홀리스


이번 경험으로 해묵은 자기 중심성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있다.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시야가 (이제야) 생긴 것 같다. 고통을 겪고 이해하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초연해지는 법을 배우면서. 진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출발점은 어디여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면서. 이제 남은 건 앞으로 살아가며 실천하는 일뿐이다. 또 가슴이 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가 내게 있다.



*제목은 찰스 부코스키의 시집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에서 따왔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윤주 작가님의 글 <원망하지 않는 사람>의 오마주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봤던, 결혼에 관한 짧은 카툰을 마지막으로 인사드립니다.

Accpet who we are inside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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