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조건>
결혼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맞다. 조건이 너무 중요하다. 명확하게 측정 가능한 조건일수록 더 중요하다. 예를 들면 돈 같은 것. 예전엔 경제적 여건만큼 쉽게 변하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지금 가지고 있다고 나중에도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지 않나?), 요즘은 그만큼 견고하고 굳건하며 모든 것의 근간이 되는 가치도 없는 것 같다. (부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돈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그래서 결정사에서는 자꾸 이상한 '평균적인 이상적 배우자상' 같은 데이터를 발간한다. 요즘 세상에선 당연한 일인데, 그걸 보고 있자면 참 우습고 슬퍼진다. 각자의 ‘이상’이 숫자로 평균화될 수 있다니.
한편, 나는 조건을 따지는 세상에 잘 적응했다. 스스로를 부단히 채찍질해가며. 성취해내야 하는 건 성취했다. 꾸며낼 수 있는 건 꾸며냈다. 감출 수 있는 것들은 감췄다. 그래서 얼추 ‘평균적으로 이상적인’ 모습으로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됐다. 내가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만큼, 상대를 가늠하는 기준도 높아져만 갔다. 나 이렇게 열심히 (꾸며내면서) 사는데. 상대도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이 정도는 바래도 되는 거 아냐?
그 억울함이 결국 관계를 망쳤다. 내가 가진 것을 셈하고 남이 가진 것을 어림하는 마음. 손익을 따지고 은근히 이득을 꾀하려는 욕심. 그리고 그건 나와 나 자신이 맺는 관계가 얄팍했기 때문이라고, 책 <사랑의 조건>은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타인과 맺는 애정관계의 질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정비례한다.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는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하므로 타인 및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드라마와 역학관계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심리를 표현한다.
<사랑의 조건>, 제임스 홀리스
고백하자면 나는 (관계에 있어) 항상 비관론자였다. 나는―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은―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구든 내 진짜 모습을 본다면 실망할 거야. 도망칠 거야. 그런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럴 자격을 갖춰야 해. 그것도 아니면 있어 보이기라도 해야 해.
하지만 난 누구보다도 조건 없이 사랑받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가진 것을 덜어내고,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을 걷어내고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나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지 않아도, 실패한 꿈들을 숨기지 않아도, 고약한 습관들을 모두 다 들키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건 내가 먼저 나 자신에게 해주어야 하는 말이었다. 내가 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거였다. 누구에게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 없는, 오로지 나의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건강한 관계는 여기서 출발한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 것'. 나는 가장 큰 부분을 미루고 있었다.
연애관계의 유일한 치유법은 나의 개성화 과정을 나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
내 반려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내 목적 달성에 이바지하는 일도, 나를 돌봐주는 일도, 내 인생에서 나를 지켜봐 주는 것도 아니라니 얼마나 실망스럽고 낭만적이지 못한가. 마치 탄생하면서 겪는 에덴동산과의 작별이나, 인간이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만큼이나 크나큰 실망이 아닌가. 분명 우리는 혼자 여정을 계속하는 존재다.
그러나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이 길은 우리와 같은 타인으로 그득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와 연민을 건넬 수도, 심지어 엄청난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서로의 여행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죽을 수 없다면 삶을 대신 살아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사랑의 조건>, 제임스 홀리스
내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상대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의 부족한 점에도 너그러워진다면, 누구에게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 스스로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누구와도 그렇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나는 문제의 해답을 찾은 것 같다.
내가 나와의 관계에서 너그럽지 못해서, 여태껏 그 누구를 만나도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이 일을 통해서 지난 연인들이 떠올랐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래서 자주 다투고 급기야 헤어지기까지 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지금껏 사랑을 한 게 아니라 집착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너무 초라해졌다. 그런데 잠깐,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열렬히 사랑할 수 있었던 거지. 아무 조건 없이 나를 품어줄 수 있었던 거지. 나는 왜 그들을 뿌리치고 달아난 거지. 갑자기 정처 없이 황망해졌다. 나는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내 집착과 결핍으로 괴로웠을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고 싶다. 그건 당신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명백하게 내가 부족했다고. 그저 내가 지랄맞을 뿐이었다고.
사랑이란, 그 사람이 자기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단순히 타자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데 만족할 뿐만 아니라 상대가 타자로 존재하도록 지지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타자를 이렇게 존중하는 일은 이론적으로 당연해 보이지만, 현실에서 이를 실현하려면 늘 우리의 연약하고 겁에 질린 본성과 싸워야 한다.
<사랑의 조건>, 제임스 홀리스
한편, 2390만 구독자를 자랑하는 유투버 Kurzgesagt가 대한민국은 망했다 South Korea is Over 라는 영상을 올려 화제다. 한국 사람들은 미래에 희망을 가지지 않고,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고, 따라서 대한민국은 망해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슬프지만 몹시 공감했다) 결국은 과도한 경쟁으로 급속 성장한 나라가, 똑같은 이유로 급속 퇴행하고 있다는 현실이 아프게 꼬집혔다. 이국의 몇천 만 유튜버에 의해. 어떻게 알았지..?
나는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로컬 한국인으로서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부연하자면 이렇다. 한국에서 아이들은 일찍부터 경쟁에 내몰린다. 부모는 생계가 바쁜 나머지 아이의 정서 발달에 관심 가지기 어렵다. 그럼 아이들은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야박해지게 된다. 더 잘해야 해. 더 노력해야 해. 그렇게 성인이 된 아이들은 여전히 자기에게 야박하고, 당연하게도 타인과 세계에 더 야박하다.
아이들 중 운이 좋은 이들은 사회적 성취를 맛보기도 한다. 그들에겐 결혼시장에서 말하는 '유리한 조건'이라는 게 생긴다. 조건을 갖추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조건의 가짓수가 많고 화려할수록 더욱 야멸차고 각박해진다. 그렇게 너그러움이라는 가치를 모르는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이들이 낭만을 좇고, 나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경험에 기꺼울 리가 있을까. 아. 써놓고 보니 내 얘기다.
그렇다면 조건을 위시한 매매혼이 성행하고, 상향혼을 부추기는 결정사가 난무하고, 초혼부터 돌싱까지 아우르는 연애 프로가 판치는 작금의 대한민국이 명쾌하게 설명이 된다.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우리는 희생의 이면을 모른다. 그게 출산율 0.72의 원인이자 결과다. 슬프지만, 나는 모두가 피해자이자 공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Q. 결혼이란 무엇인가.
A. 봉사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가벼운 고백>, 김영민
늦었지만 이제라도 책에 쓰인 대로 ‘사랑의 조건’을 추구해 보기로 다짐한다. 먼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짐으로써 세계에 너그러워지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걸 넘어 그를 완전히 지지해주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망해갈지라도 이 사회에 내 몫의 사랑은 반드시 더하겠다는 마음으로. 내일 국민연금이 고갈된다고 해도 의연하게 연금 고지서를 받아드는 마음으로.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처럼.
국민연금 고갈을 걱정하는 또래 세대에게 한 마디. 우리에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뜯기는 건 연금이 아니라 한국어 사용료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조국에 보내는 부의금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주륵) 그나저나 <사랑의 조건>은 꼭 읽어보세요. 완전 추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