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시가 있다면, 바로 도종환 시인의 <내소사>라는 시다. 많은 분들이 읽어봤으면 해서 전문을 가져왔다. 잠시 감상 타임.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
능가산 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했었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 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
몇백 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도 모르면서
*공포 (栱包) : 처마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단순히 내소사 가봤다고 해서, 내소사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적막과 고독과 비명을 지르는 시간들을 모르면서, 그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비단 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욱 울림이 깊다.
우리는 주변 이들에 대해 (특히 가까울수록) '안다'고 생각한다. 관계의 모든 문제는 거기서 발생한다. 내가 상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귀는 막힌다. 내가 잘 아는데, 당신은 이런 마음일 거야. 당신은 내게 이런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을 거야. 알아서 해석하고 쉽게 단정 짓는 것이다.
상대가 나에 대해 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고, 혹은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입은 닫힌다. 내가 이런 것까지 말로 표현해줘야 해? 이 정도쯤은 이제 당신이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구차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화가 서로를 완벽하게 파악하게 해 줄 거라는 착각, 말이 그 사람을 온전히 드러낼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한 번 파악하면 그 후로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신념. 그것들이 모여서 우리는 크고 단단한 오해를 빚는다. 그 오해를 굴리고 굴리며 친분이 더 돈독해진다고 착각한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내가 아닌 나'가 있을까.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박사
나는 그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어질 때에야 비로소 내가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은 이런 비극을 낳는다.
나는 그를 몰랐다.
주변 이들과 다른 나의 커리어는―개원해서 한창 돈 벌 나이에 스타트업이나 다니는―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나를 자랑스러워한다고 착각했다. 나는 쪽팔림으로 괴로워했다. 신혼 때는 작은 빌라에서 아끼면서 시작하는 게 좋다던 그의 마음씨에 나는 감동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는 막상 신혼집을 구할 때가 되니 역세권 신축 아파트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배신감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기저에 어떤 두려움이 있었는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도 나를 몰랐다.
겉으론 항상 평온해 보이는 나는 언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드는지. 갈팡질팡하는 커리어 속에서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인지.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와 다정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그 경험들은 내 안에서 어떤 창을 만들고 어떤 방패를 만드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모순을 빚어내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나도 나를 몰랐다.
나는 왜 때론 잔인해지거나 유치해지는지. (혹은 어떻게 동시에 그럴 수 있는지) 나는 왜 어떤 말투 앞에서는 도무지 참을 수 없게 되는지. 어떤 상황 속에서는 유독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지. 그 '버튼'들은 어떤 결핍에서 비롯하는지.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하지 못하니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말싸움에 지기 싫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나를 몰랐다. 아마 그도 그 자신을 몰랐을 거다.
그런가 하면 나는 ‘결혼’에 대해서도 몰랐다. 특히 서로가 생각하는 결혼이 너무 다르다는 점도 몰랐다.
故 마광수 교수는 인간을 "상징의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라고 칭한 바 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언어라는 '상징'으로 소통하는데, 상징의 모호성 때문에 진정한 의미 전달이 어렵다는 말이다. 예컨대, ‘평범한 삶’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자. '평범'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누군가는 보통의 회사를 다니는 삶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평범한가. 세상엔 직장을 얻는 것 자체를 동경하는 삶도 있다. 반대로 회사를 다닌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하는 삶도 있다. (하하)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평범한 삶'도 천 가지 모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고 할 때, 처음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공간의 본질보다는 '공간'이라는 말이 갖는 언어적 음감과 글자의 자형 등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본래의 존재로서의 공간보다는 '공간'이라는 언어형상을 통해 비로소 공간을 생각해 내게 되는 거꾸로 된 과정을 밟고 있다. 즉 사고를 본질적 대상물에서 귀납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 상징형식을 통해 연역적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상징의 긍정적 효용은 한 가지로 다른 것을 추리하여 무한히 많은 사실들을 유추해 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연역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오히려 실상의 본질이 가려지고 독단적 선입관의 오류 속에 빠져들 위험성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의 효용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또한 그것이 야기하는 위험성을 경계하는 유연성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하여>, 마광수
상징의 필연적 왜곡 현상은 '결혼'이라는 단어에서 도드라진다. 결혼식장, 신혼집, 새 가구들, 일상적인 저녁 식사, 아이와 함께하는 주말 오후의 모습 등등. 각자가 상상하는 결혼의 장면이 각기 다를 것이다. 만약 '결혼 생활’에까지 단어가 확장된다면, 불길처럼 번지는 오해와 혼선을 막을 길이 없어진다. ‘생활’은 얼마나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는가. ‘생활’은 얼마나 구체적으로, 지긋지긋하게 펼쳐지는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러니 만약 연인이 ‘당신과의 평범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어'라고 넌지시 말한다면, '나도 그래!' 하며 배시시 쪼개고 말 것이 아니라 자세를 바짝 고쳐 앉고 되물어야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평범이란 뭐야? 당신이 생각하는 결혼생활이란 뭐야? 당신이 생각하는 생각이란 뭐야? 그의 상징(?) 속 진짜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음표 살인마에 빙의해 갈고리를 난사한다면, 소통은 가능할까? 오독은 줄어들까? 아마 아닐 것이다. 높은 확률로 '이 또라이를 어쩌지', 하는 경멸의 눈빛이나 받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방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기 어렵고, 그가 하는 말도 완벽하게 이해할 길이 없다면. 상대를 모르는 데 어떻게 결혼을 결심할 수 있는 것인가. 막상 결혼을 했는데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모르겠어서, 그게 분하고 억울해서 엉엉 울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이 시리즈에서 두 번이나 인용할 정도로 좋아하는) 이윤주 작가는, 남편을 답답해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가. 지긋지긋한 게 과연 당신인가.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인 적이 없는데. 내가 당신을 낳았어도, 당신이 나를 낳았어도, 아니면 당신과 내가 누굴 같이 낳았어도, 나는 당신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무슨 근거로 ‘당신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것은 당신을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 아닌가. 오래된 어느 날 당신을 거칠게 욱여넣고 한 번도 업데이트하지 않았던 그 프레임.
그리하여 외워야 한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서로에게 복창해야 한다. 내가 아는 건 오직 내가 당신을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기대를 품거나 실망하거나 심지어 난동을 부리는 일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껏 살아왔으면서 나를 그렇게 몰라?” 따위의 언설도 금물이다. 모른다. 모르니까 설명해 주고, 초면인 것처럼 경청하라. 알고 있다는 믿음을 부수고, 끝내 알 수 없다는 자각을 반복하지 않으면, 지옥은 깰 수 없다.
<나를 견디는 시간>, 이윤주
우리는 상대를 평생 알지 못하고, 한 번도 알았던 적 없고, 끝내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외워야 한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자다. 나는 결혼을 해보지 않아서 거기 어떤 지옥이 펼쳐지는지 잘 모르지만, 이것이 본질에 가장 근접한 답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