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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결혼을 위한 숙제, ‘너구리 받아들이기’

by core Mar 1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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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웬 너구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꽤나 중요한 함의가 있다. 들어보시라.


그와 나는 양재천을 사이에 두고 집이 가까워서 자주 산책을 했다. 양재천 산책로엔 너구리에 관한 특이한 팻말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요컨대 “근처엔 너구리가 서식하니 주민들께서 너무 놀라지 마시고 고양이나 비둘기처럼 생태계의 일원으로 여겨달라”,는 다소 귀여운(?) 팻말이다. 그와 나는 처음에 이 팻말을 발견하고 얼마나 깔깔대며 웃었는지 모른다.


‘너구리 받아들이기’가 킬포‘너구리 받아들이기’가 킬포

웃음 포인트는 바로 네 번째 항목 '너구리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다른 항목들과는 달리 표어가 생뚱맞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구리 받아들이기' 라니. 아니, 너구리는 못 받아들인다는 민원이라도 있었던 걸까. "양재천에 너구리는 안돼!!!!" "너구리만은 인정할 수 없어!!!" 하고 절규하는 사람이 있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근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조금 이해도 된다. 양재천에는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시민들이 많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는 야생동물을 보고 다가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강아지에게 위협을 느낀 너구리가 선빵을 칠 수도 있을 거다. 너구리는 광견병의 숙주다 보니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강아지와 견주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너구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포획해서 살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있었겠다 싶다.

실제로 너구리 목격함실제로 너구리 목격함




자,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연애와 결혼을 ‘(너구리가 출몰하는) 양재천 산책’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어느 가을, 양재천어느 가을, 양재천

연인이란 무엇이냐. 개울을 사이에 두고 양쪽 편에서 각자 걷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걷다가 가끔 징검다리 중간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부부란 무엇이냐. 개울을 건너와 한쪽 편에서 나란히 걷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아예 함께 걷는다. 상대가 강을 건너와 내 쪽 풀숲으로 걸을 때도 있고 내가 강을 건너가 그쪽 갈대밭으로 걸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풀숲에서, 갈대밭에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거다. 나의 풀숲에선 너구리가 나올 수도 있고 그의 갈대밭엔 살쾡이가 살 수도 있다.  


너구리가 나는 익숙하다. 그동안 걸으며 이미 많이 보았으니까. 그리고 너구리는 귀여우니까. 하지만 그는 너구리에게 위협을 느낀다. 너구리 좀 치워 주면 안 돼? 반대로 그는 살쾡이가 아무렇지 않다. 고양이랑 별다를 것도 없는데 뭐. 나는 살쾡이가 무섭다고 생각한다. 살쾡이는 고양이도 물어 죽인다구.

이런 너구리 말고이런 너구리 말고

강은 계속해서 흐르고, 부부가 된 연인은 끝없이 (상대의) 풀숲과 갈대밭을 헤치며 걸어야 한다. 너구리와 살쾡이와 함께 말이다. 이상하다. 강 건너편에선 갈대밭이 아름답게만 보였었는데. 풀숲이 운치 있게만 보였었는데. 지금 보니 무시무시한 야생동물들의 터전이다.


그럴 때 서로를 구원해 주는 건 뭘까. 각자의 '적당한 무신경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너구리 받아들이기' 같은 팻말을 상대에게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살쾡이가 모습을 보였을 뿐인데 꽥 소리 지르며 호들갑 떠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른 척, 대수롭지 않은 척 지나가 주는 거다. 오, 여기엔 너구리가 사네. 신기하다. 그럴 수도 있지. 여기선 내가 조금 조심해야겠다. 근데 쟤들도 여기 사느라 힘들겠다. 이런 마인드.


물론 서로 지켜야 할 것도 있다. 첫째, 우리 너구리는 안 물어요. 우리 살쾡이 한번 쓰다듬어보세요,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거다. 너구리는 당신에게나 예쁘고, 그 어떤 것도 상대에게 당연하지 않다. 둘째, 상대방에게 아무 동물이나 수용해 달라고 떼쓰지 말아야 한다. 인생이란 산책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너구리 정도나 가능하지, 무슨 벵갈호랑이 같은 걸 숨겼다가 보여줘선 안 된다.




돌이켜보면 그는 나의 너구리를 보고 놀라서 도망했다. 동시에 나는 그의 살쾡이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고. '평생' 걸어야 하는데 저런 무시무시한 야생동물이 있는 곳으론 갈 수 없어,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 너구리니 살쾡이니 하는 것들은 대충 적당히 무시하고 (적당히 받아들이고) 그저 함께 산책을 하면 되는데. 그냥 풍경을 즐기며 여유롭게 걸어 나가면 되는데. '너구리 박멸' '살쾡이 완전 제거' 같은 걸 조건으로 내걸었으니 함께 걸을 수 있을 턱이 있나. 앞으로 튀어나올 야생동물들이 한 트럭인데 말이다.


그걸 이제야 깨닫고 이렇게 쓴다. 그러니 다들 양재천에 가시면 너구리를 받아들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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