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건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삶의 철학을 실천하며 주기적으로 물건을 비우지만, 나에겐 그게 어렵다.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기억, 손때, 애정 같은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래서 내 물건들은 하나같이 오래됐다.
캐나다 유학길에 오르면서 가져온 선풍기는 한국에서 신문 1년 구독 시 주는 사은품으로 받은 것이었는데,
이것도 언 30여 년이 되었다. 낡아 빠질 대로 빠지고, 기능도 예전 같지 않지만, 쉽게 버려지지가 않는다.
우리 집 샐러드 스피너도 그런 존재 중 하나였다. 15년 전에 한국에서 온 막냇동생이 편리할 것 같다며 하나 사 가면서 나를 위해 하나 더 사서 선물로 주고 간 것이다. 얼마 전에 뚜껑과 본체를 연결하는 잠금 스냅이 떨어져 나갔다, 손잡이는 미세하게 금이 갔다. 돌릴 때마다 기분 좋은 ‘윙—’ 하는 소리는 이제 ‘덜컹’으로 바뀌었고, 물먹은 야채들이 제대로 물기를 털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이 그 스피너를 돌렸다. 익숙한 리듬, 손에 익은 감촉, 뭔가를 버리고 새로 들이는 일에 대한 주저함. 다 그것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 결정적으로 뚜껑이 열리고 스핀 하던 야채와 과일들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참사가 벌어지고, 새것을 사야겠다 마음먹었던 것이다.
캐나다에서 주로 저렴한 가격에 인테리어 소품, 주방용품, 가구, 조명, 침구류, 러그 등 다양한 홈 데코 아이템을 판매하는 HomeSense 에 가서 신중하게 고르고 골라서 새 샐러드 스피너를 사 왔다.
새 샐러드 스피너를 집으로 데려온 날, 나는 오래된 스피너를 부엌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단순한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저녁 식사와 손님들을 초대해서 먹었던 식사 풍경들이 들어 있었다. 고마웠다고, 덕분에 신선한 채소들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고,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기념촬영으로 은퇴식을 대신하고 재활용 쓰레기통에 그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비로소, 그동안 고장 난 채로 버티게 했던 나의 고집을, 조금 내려놓았다.
샐러드 스피너 하나를 버린 일이 대수냐고, 너무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아니냐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작은 변화의 시작이다.
은퇴할 나이가 되면 더 현명해지고, 지혜로우며,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 취사선택(取捨選擇)에 대해 좀 더 분명해질 것 같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작은 일 하나에도 얼마나 우유부단했는지, 다행히도 그 망설임 끝에 낡은 것을 억지로 붙잡기보다, 제 때 보내줄 줄 아는 용기. 물건이든, 감정이든, 관계든.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줄도 알아야 더 나답게 살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조금 배운 것 같다.
이제 나는 새 스피너로 아삭아삭한 채소를 돌리며,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