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7월 여름날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제니스 보로우(Janice Burrowes)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다.
어제 비융(Viewing-돌아가신 분이 평소 좋아하셨던 옷을 입히고 화장을 해서 관 위에 놓이고 사람들이 차례로 가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는 의식)이 있어서 남편이름으로 꽃을 보냈다.
한국에서는 상주에게 부주를 하는데 여기서는 꽃을 보내거나 자신이 치료받았던 병원에 기부금을 내어주는 걸로 한다.
장례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여기서는 어떻게 그 비용을 대는지 잘 모르겠다.
장례식장이 여기서 멀지 않아 다행이다.
오늘에서야 나는 제니스(Janice)가 우리 엄마와 4살 차이밖에 안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3명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녀의 고향은 발베이도(Barbados)라는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이다.
그녀가 퀘벡 몬트리올로 이민 온 것은 60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나의 이민 선배인 셈이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다니던 교회에서 만났다.
처음 몬트리올이라는 도시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고, 언어(French)도 다시 배워야 하는 부담감과 도시생활
( Manitoba는 Montreal에 비해 시골스럽다)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친절했으나, 그녀의 발베이도(Barbados)의 억양이 섞인 영어는 사실 나에게는 좀 어려웠다.
그런 나를 제니스(Janice)는 항상 웃는 얼굴로 허그(hug) 해 주었다.
소천하기 몇 달 전에 나는 교회 입구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일 아셀스톤(Athelston)을 만났다.
오래전부터 뇌종양과 유방암을 치료 중이어서 교회에 매주 출석하실 수 없었을뿐더러 COVID-19 펜데믹으로 인해 교회가 문을 닫게 되어서 그분들을 뵌 지도 벌써 5-6년쯤 되었다. 두 분 다 몹시 허약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뛰어가 그녀를 안았다. 여전히 품은 따뜻했으나, 너무 야위어서 내 품이 너무 넉넉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달 전에 반갑게 만난 그녀가 지금은 코픈 (coffin) 안에 누워계신다.
아마 그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지하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는데 바로 옆에 차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얼굴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하얀 은발머리에 짧은 커트를 한 엘레나(Elena)였다. 우리는 같은 고향 마니토바라는 공통점으로 내적 친밀감이 생기고, 그 후로도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그녀 또한 노환으로 인해 지금은 온라인 예배를 드리느라 뵐 수 가 없었다.
그녀를 부축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열리니 바로 채플실(Chapel)이었다.
그곳엔 많은 문상객들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옛사람들이 와 앉아있었다.
이런 문상 와서 반갑다고 웃어도 되는 건지 잘 몰라 어정쩡한 표정으로 그들과 진한 비즈(La bise-퀘벡사람들의 인사법으로 양쪽 뺨에 가볍고 키스를 해준다.)를 했다.
얼마 전 오타와(Ottawa)로 이사 간 웰링턴(Wellington)과 디 (Dee)도 와 있었다.
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오는 길에 나와 남편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실린(Ciline)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잠시 후 메모리얼 서비스(Memorial Service- 한국으로 말하면 장례예배)가 시작되고, 목사님이 나오셔서 시편으로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제이슨(Jason)이 나와서 회중의 찬송가를 인도했다.
찬송가는 제니스(Janice)가 살아생전에 자주 불렀던 것으로 3곡을 선정해서 불렀다.
제니스(Janice)는 음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재능도 있어 언제나 성가대에서 찬양을 했다.
모두가 그녀의 음악사랑을 잘 알고 있다.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준비하고, 지휘자를 청빙 하고, 성가대원을 모집하여 크리스마스이브 때 칸타타 공연을 할 때쯤이면 그녀는 항상 바빴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한다. 그녀의 빨간색 스웨터를
크리스마스 때면 그녀는 항상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코사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메모리얼 서비스(Memorial Service)가 있는 채플 (Chapel) 안에는 7월의 더운 열기가 돌고, 드문드문 세워둔 선풍기 바람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이 살짝 마르긴 했지만, 습습한 바람이 돌았다.
그렇다고 불쾌한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의 장례식장과는 달리 이곳에서 장례식은 좀 더 절제된 슬픔과 고인과의 즐거운 추억들을 기억해 내며 한 바탕웃음이 채플(Chapel) 안을 가득 채웠다.
유족들도 한국처럼 통일된 상복이 아닌 어두운 톤의 평상복으로 입었고, 문상객들도 화려하지 않은 옷이었으나 모두가 검은 옷을 입지는 않았다.
막내딸인 안젤라(Angela)가 나와서 엄마에 대한 이력을 쭉 읽어나가며 엄마인 제니스가 얼마나 유머스러운 운 사람인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서 분위기는 울다가 웃다가 ddong구멍에 털이날 순간이 많았다.
오랜 친구였던 엘렌(Ellen)은 제니스(Jenice)를 기억하며 성경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의 열매 중에 신실한, 충성스러운 (Faithfulness)-를 생각나게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인 발렌시아(Valencia)도 그녀의 밝은 모습을 기억하며,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울컥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그녀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니스는 모두에게 열심 있는 사람으로, 신실한 사람으로,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었기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채플(Chapel)을 가득 채운 것이 아닐까 싶다.
나 조차도 그녀의 장례식이 나에게 특별했던 것처럼 말이다.
늘 단아하고, 단정했던 그녀의 모습이 코픈(coffin) 위를 장식한 꽃에서 다시 느껴진다.
이제 메모리얼 서비스가 끝나고 나면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발베이도(Barbados)에 가게 된다.
고향에다 묻어달라 유언했기 때문이다.
메모리얼 서비스가 끝나고 아셀스톤(Athelston)과 악수를 하고, 안젤라(Angela)와는 위로의 포옹을 했다. 안젤라(Angela)는 꽃을 보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의 장례식에는 누가 올지
우리의 장례식은 어떤 분위기 일지 ‘
그런 깊은 상념으로 차 안에는 아무 대화 없이 깊은 침묵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