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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의 잡학다식 Aug 28. 2021

사랑을 말하는 위대한 다큐멘터리

서평, <닥터 홀의 조선회상>(좋은 씨앗)

  꼭 성탄절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몹시 바쁜 12월, 잠들기 전 겨우 몇 페이지 보는 것으로는 750페이지 짜리 두툼한 이 책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 모처럼의 연휴를 이용해 단숨에 읽었다.

100년 전 조선에서 평생을 바쳐 의료 선교활동을 했던 홀 家의 풀 스토리. 촉망받는 의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과 그의 아내 로제타 홀, 그의 아들 닥터 셔우드 홀과 아내 메리안 홀의 가족 이야기는 나의 분주했던 연말을 차분하지만 뜨겁게 마무리해 주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1800년 대 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난했던 '은둔 왕국' 조선에 자원, 병원을 세우고, 병자를 돌보다 둘째를 임신중인 아내를 두고 이질에 걸려 죽은 윌리엄 제임스 홀. 그렇게 낳은 딸이 얼마 뒤 아버지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의사를 길러냈고,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교를 설립해 일한 로제타 홀.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자랐고, 미국으로 건너가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되어 역시 의사인 아내 메리안을 만나 결혼해 조선으로 들어와 해주 구세병원을 세운 셔우드 홀. 당시 다섯 명 중 한 명이 걸려 세계 1위의 감염율로 조선 사람들이 '천형'처럼 알던 결핵 퇴치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요양원을 세우고, 크리마스 씰을 처음 도입한 사람.

  이 책은 닥터 셔우드 홀과 아내 마리엔 홀이 1940년 일본군부에 의해 추방되어 인도로 건너가 여생을 봉사하다 은퇴한 뒤 쓴 것이다. 1991년 6개월 차이로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셔우드 홀 부부는 유언대로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누이 에디스, 아들 프랭크가 묻힌 한강변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나는 지금도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가족사이자 한국의 의료선교사이기도 하며 100년 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풍속를 읽을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일해 왔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세계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조선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은 어떠하였는지 보여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셔우드 홀과 아내 마리엔은 의사로서 매우 정확하고 사실에 근거한 글을 썼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 논픽션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 책은 성서의 <사도행전>과 비견된다. 사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성서에서 기록으로서 가장 흥미진진한 책은 <사도행전>이다. 이 복음서는 예수 이후 기독교가 어떻게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는지, 예수의 제자들이 어떻게 로마, 아시아 지역에 전도하였는지 보여주는 역사적인 기록물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로 초대 교부들은 한결 같이 예수의 제자 누가를 지목한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의 직업이 의사라는 점이다. 그는 사람의 이름, 지명, 숫자, 사건의 정황 등을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했는데 이 점에서 셔우드 홀의 <조선회상-With Stethoscope In Asia : Korea>는 <사도행전>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엘리트로 평생 존경과 부유 속에 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들은 왜 그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단 한 번 가보지 않았던 조선으로 오게 되었을까? 그들은 왜 그 엄청난 고난과 핍박, 가족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일하고자 하였을까?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조선에 보낸 분은 누구일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사랑으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알되 사랑의 빚진 자 되어 다시 타인에게 갚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정리해본다.


첫째, 자신이 하는 일을, 만나는 사람을, 경험하게된 사건을 글로 써서 정리하고, 기록하라 . 자신에게는 용기와 확신을, 동역자에게는 정확한 의지와 지침을, 후대에는 역사를 남긴다. 셔우드 홀은 글로 기록한 것 뿐 아니라 사진과 동영상으로도 많은 자료를 남겼다.


둘째,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 하라. 이 책 많은 부분은 홀 가족 구성원이 타인에게 보냈거나  받은 편지들에 의거해 연표와 사건을 재구성한.것이다. 편지와 전보는 이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였고, 긴박한 순간 속에서 도움을 받고, 사랑을 전하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 물론, 후대를 위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다. 아마도 이들이 크리스마스 씰 사업을 생각해 낸 것도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였고, 엄청난 양의 편지를 주고 받아온 생활 습관에서 오지 않았을까?


셋째, 우정과 사랑을 쌓고, 전하고, 나누어라. 이들의 위대한 사역은 그들의 뜻을 이해하고 기꺼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후원해 준 동역자들 덕분이었다. 이들은 심지어 만주 사변이 발생한 시점 마지막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조선으로 오는 위기 중에도 친구를 사귀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의 우정엔 국경이 없었다. 영국, 러시아, 중국, 일본, 호주, 캐나다, 물론, 조선의 친구들까지.


넷째, 배우고 가르치고, 준비하라. 셔우드 홀 내외는 꾸준히 공부했고, 기회가 닿는 대로 배웠다. 심지어 결혼 후 조선에 오는 도중 유럽에 들렀을 때 조차 그들은 영국의 열대병학회를 찾아가 의사들을 만나 배웠고, 프랑스 파리의 마담 퀴리 연구소에 방문했다. 학회나 선교사 모임으로 서울에 오면 조선말을 배우기 위해서 며칠을 쪼개서 썼다. 부부는 두 차례 찾아온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돌아가서도 선교 보고회, 후원 교회 방문 등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대학원에 등록해 선진 의학 이론과 기술을 익혔다. 그들이 준비하고, 공부하고, 배운 것은 고스란히 조선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귀하게 쓰였고, 후진 양성에도 기여했다.


다섯째, 쉬고, 즐겨라. 그렇게 바쁜 가운데에도 친구들을 사귀고, 초대하고, 음식을 나누고, 파티를 열었으며 장마철, 농번기 환자가 적은 틈을 이용해 소래, 원산 등 조선의 바닷가를 찾아 휴가를 즐겼다. 셔우드 홀의 금강산 기행문은 참으로 볼 만하다. 인생의 순간 순간을 기쁘고 황홀하게 누리고, 즐기는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도, 사명도, 짐도 가끔씩은 내려 놓고 쉬고, 느끼고,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도 천지를 만드시고 이레 째는 쉬시지 않았나?


  100년 전 조선과 한국, 이 땅의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한 가족 2대의 이야기 <닥터 홀의 조선회상>은 가치있게 사는 삶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알고 느께게 해준 귀한 성탄절 선물이다. (2010년 12월, 블로그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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