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꼴레오네의 수필집 #025

by 꼴레오네

아버지의 고향이자 내 할머니 댁이 있는 곳은 경북 문경이란 곳이다. 인구가 심각하게 적진 않아 여전히 '군'이 아닌 '시'로 불리우는 곳이지만, 할머니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런 도심 마저도 충분히 벗어난 시골이다. 주위에 낙동강이 흐르는 그곳은 산을 하나 넘어야만 했고, 넓은 논밭 옆의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도착할 수 있다.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고, 그리 작지 않은 호수도 있는 곳이다. 동네에는 그 어떤 마트나 식당도 없으며 버스도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그야말로 '깡시골' 그 자체인 곳이다. 이십 년 전 즈음 그나마 작은 매운탕집이 생기긴 했지만 그뿐, 여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마트나 식당은 들어서지 않았다. 할머니 말을 빌리자면 625 전쟁 당시에도 전쟁이 난 것조차 모르고 있던 곳이라고 한다.


어려서는 매 주말마다 할머니댁을 방문하곤 했다. 사실 내가 살던 안동도 그리 다양한 이벤트가 있던 곳은 아니었기에, 어딘가 가족여행을 가지 않고서는 매주 갔던 것 같다. 그곳에서 경험한 많은 것은 여전히 나에게 큰 자산으로 남아있는데, 문명과 거리가 있는 자연 그 자체였기에 도시에서는 절대 하기 힘든 많은 경험들을 나는 무료로 그리고 당연하게 접할 수 있었다. 봄이면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는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논 근처에 가면 학교에서 배우던 물방개나 장구벌레, 우렁이, 소금쟁이 따위를 볼 수 있었다. 가끔 청개구리가 뛰어놀던 곳이었고 할머니 댁 담벼락 아래에 자라고 있던 봉숭아로 손톱 물들이기를 하기도 했다. 옆집 할아버지는 크고 늙은 소를 키우고 있었고 그 소를 타고 돌아다니시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할아버지를 "소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했었다. 경운기는 너무 흔해서 경운기 뒤에 타고 가는 일 또한 흔했으며, 경운기로 밭을 가는 모습도 직접 볼 수 있었다. 가을이 되면 동네 온 천지 잠자리가 날아다녔고, 그런 잠자리를 잡으면서 놀았던 것 기억이 생생하다. 그 넓은 논이 무르익을 때 즈음이면 실로 황금 들판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도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 곳곳에 감나무가 있었고 기다란 장대로 감이나 밤 따위를 따기도 했다. 고추를 따기도 하였고 밭에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비닐을 덮는 것도 도와주었고, 깨를 털거나 고추를 말리는 모습도 그곳에선 그저 일상이었다.


그 시절 나에게 맡겨진 일중 가장 재밌었던 일은 부탄가스를 호미로 찍어 안에 있는 가스를 모두 빼내는 일이었다. 연탄식 보일러를 사용하던 할머니 집에서 연탄을 나르거나 다 사용한 연탄을 버리는 일도 꽤나 재밌었던 것 같다. 마당 어딘가에 장독대가 늘 즐비했고 거기서 실제로 고추장이나 된장 따위를 꺼내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김장을 하고 김장통이 부족하면 땅을 파서 장독대를 묻어버리고 그곳에 김치를 넣기도 했다. 삽으로 땅을 파거나 호미를 가지고 놀다 보니 학교에서 모종삽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면 아쉽게만 느껴졌고, 학교 교과서에 나올 법한 무언가를 직접 하고 있으니 공부할 때 이해도 더 잘 되었던 것만 같다.


칠 남매 중 막내였던 아버지 탓에 내가 태어난 이후 기억에 존재하는 할머니는 벌써 일흔이 넘은 연세셨다. 이미 무릎이 좋지 않으셨기에 멀쩡하게 두 다리로 걸으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본 적 조차 없다. 언제나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어 다니셨으며 그마저도 집 안에서는 기어 다니셨고,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나와 동생은 그 지팡이를 가지고 칼싸움이나 하며 놀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뒷마당 밭에서 고추나 배추 따위를 심어 키우시곤 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셨다. 듣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했지만 읽고 쓰실 줄 모르셨다.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아오신 것 같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내가 사투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 것도 할머니의 영향이 크다. 표준어보다는 사투리를 더 많이 쓰시던 할머니 덕분에 그 사투리 또한 나는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에서 볼 법한 맷돌도 있었고 직접 매주를 쓰고 곶감도 만들던 곳이었다. 어디 가서 그런 농촌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을 보면 낯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너무 당연한 일상인 것이, 누군가는 궁금해서 내지는 하고 싶어서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참 웃겼던 것 같다.


아무튼 나에게 할머니는 그런 분이셨고, 할머니댁은 내 소중한 많은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나보고 공무원 하라고 하시던 할머니는, 단 한 명의 손주도 공무원이 되는 것을 보지 못 한 채, 아흔이 넘어서까지 사시다가 무탈하게 돌아가셨다. 거의 한 달을 아무것도 드시지 않다가 헛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고 고통스럽지 않게 돌아가셨으니,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어쩌면 축복이란 생각도 한다.


지금도 할머니 댁에 가끔 방문한다. 마치 할머니가 아직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여전히 그곳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마트나 식당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여전히 논에서는 벼가 자라고 있는 곳이다. 무척이나 별이 잘 보이는 그곳, 온갖 곤충이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면서 밤에는 여기저기서 곤충이나 부엉이 따위의 소리가 항상 들려온다. 여전히 그곳은 시골이고 내가 살아온 삼 십 년 동안 달라진 것이 없다. 그래서 좋다.


세상에는 어쩌면 그런 동네도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주 귀한 경험이 아닐 수 없기에, 그런 할머니댁에서 당연하게 느껴볼 수 있던 많은 무언가도 나에겐 시야를 확장시켜 줄 수 있었던 큰 자산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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